2007/06/25 03:50
57주년 6.25다..
나야 전쟁후 31년 뒤에나 태어난 '전후세대'이자.. 6.15 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평화세대(?)'의 당사자이기에..
6.25에 대한 이해는 이전 전쟁세대 당사자들분과는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6.25에 대한 중요도는 떨어진게 사실인거 같다..
1990년대만 해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과 같은 노래가 많이 나오고..
언론 기사에도 6.25 특집으로 기사들이 가득했는데..
요즘 기사들 title이 "초등학생 대부분 6.25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와 같은 기사뿐이니 말이다..
(솔직히 그런 기사들은 취지도 의심스럽고, 표본 대상도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6.25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크리스챤의 시각은 다른 것이 사실이다..
다음은 부산 성시화 운동본부에 나온 기사이다.
이 기사에 추가해야 할 것은..
남북한의 전쟁, 그리고 UN의 참전까지.. 쉽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숨겨져 있었고,
모든 상황이 거짓말같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아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을 하나님이 '특별히'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도 아니고..
한국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선한 민족이기 때문에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57년전의 사건을 통해서..
한국이 열방을 섬길 제사장 국가로..
그리고 자기를 침략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민족으로..
기업 무를 자로서의 위치에서 북한을 끝까지 섬길 수 있는 민족으로..
그렇게 만드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6.25.. 이 일 때문에 북한을 증오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북한을 증오하지도, 미국을 숭배하고도 싶지 않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일은 북한, 중국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 뿐이다..
나야 전쟁후 31년 뒤에나 태어난 '전후세대'이자.. 6.15 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평화세대(?)'의 당사자이기에..
6.25에 대한 이해는 이전 전쟁세대 당사자들분과는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6.25에 대한 중요도는 떨어진게 사실인거 같다..
1990년대만 해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과 같은 노래가 많이 나오고..
언론 기사에도 6.25 특집으로 기사들이 가득했는데..
요즘 기사들 title이 "초등학생 대부분 6.25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와 같은 기사뿐이니 말이다..
(솔직히 그런 기사들은 취지도 의심스럽고, 표본 대상도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6.25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크리스챤의 시각은 다른 것이 사실이다..
다음은 부산 성시화 운동본부에 나온 기사이다.
1950년 7월 2일(주일). 이승만 대통령은 6.25가 일어난지 정확히 1주일만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이때 부산 초량교회에서는 6.25 전란에 따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가 열리면서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한국과 한국민을 위해 기도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 뉴욕 유엔본부(서울시간 6월 26일 오전 4시)에서 6.25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뉴욕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상임 이사국은 미. 영. 불. 중. 소련 등5개국이고, 비상임 이사국은 쿠바. 에쿠아돌.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등 6개국 도합 11개국이 안보리 이사국이었다.
특기할것은 유엔 안보리가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열린 탓에
각국 대표들은 거의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안보리가 소집되어 소련과 중국 대표가 반대를 하면 한국전 참전은 안보리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어느 한나라라도 반대를 하면 그 안건은 심의나 표결을 할 수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 대표는 이날 차를 타고 회의장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고, 엔진이 고장나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고, 한편 소련 대사는 전날 저녁 늦게까지 파티에서 과음을 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나 병원 신세를 지느라도저히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반대국 대표들의 불참으로 극적으로 유엔군의 한국 참전 결정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초랑교회에서 드린 구국기도회의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사 안보리의 한국참전이 절대 다수결로 통과되게 하셨다.
만약 스탈린이 김일성의 연락을 받고 말리크가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면 유엔 참전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때 부산 초량교회에서는 6.25 전란에 따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가 열리면서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한국과 한국민을 위해 기도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 뉴욕 유엔본부(서울시간 6월 26일 오전 4시)에서 6.25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뉴욕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상임 이사국은 미. 영. 불. 중. 소련 등5개국이고, 비상임 이사국은 쿠바. 에쿠아돌.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등 6개국 도합 11개국이 안보리 이사국이었다.
특기할것은 유엔 안보리가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열린 탓에
각국 대표들은 거의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안보리가 소집되어 소련과 중국 대표가 반대를 하면 한국전 참전은 안보리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어느 한나라라도 반대를 하면 그 안건은 심의나 표결을 할 수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 대표는 이날 차를 타고 회의장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고, 엔진이 고장나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고, 한편 소련 대사는 전날 저녁 늦게까지 파티에서 과음을 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나 병원 신세를 지느라도저히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반대국 대표들의 불참으로 극적으로 유엔군의 한국 참전 결정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초랑교회에서 드린 구국기도회의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사 안보리의 한국참전이 절대 다수결로 통과되게 하셨다.
만약 스탈린이 김일성의 연락을 받고 말리크가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면 유엔 참전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사에 추가해야 할 것은..
당시 소련(USSR)은 중화인민공화국(PRC)이 중국에서 중화민국(ROC)를 대만으로 몰아낸 뒤에 China의 대표로서 UN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안보리회의 자체를 boycotting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Stalin은 Veto를 할 수 없었고, 동시에 중국(China)의 대표로는 중화민국(ROC)의 대표가 투표를 하였던 것이다.
UN군의 한국군 참전을 결정하게 된 안보리 결의(Resolution 82)가 통과된 뒤에 소련(USSR)은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투표는 무효라고 항의 했으나, 불참 또한 투표행위라는 논리로 거부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UN군 지원을 위한 추가조치가 필요했으나 Resolution 82 이후 안보리에 참석한 소련(USSR)이 의장국이 었기 때문에 통과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때 미국이 사용한 논리는 '국제 평화 안보를 안보리에서 지키지 못하면 UN 총회의 결의를 통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UN의 의사결정 중 전무후무한 안보리가 아닌 UN 총회의 찬성으로 통과되는 결의(Uniting for Peace Resolution)가 채택되었다.
또한, 미국이 이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만(Truman)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으로 공산주의에 너무 온화하게 대응한다는 국내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특히, 중국을 공산주의에 '잃어버렸다'는 비난과 함께 과거 2차 세계대전의 뮌헨신드롬(서방국가들이 1938년 뮌헨협정으로 체코의 영토를 히틀러에게 양도해주며 온건한 정책을 폈던 것이 결국 나치 독일의 확장을 가져왔다)에 대한 반성이 강경한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트루만 대통령은 참전을 위한 국회 동의를 요청하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해서 바로 UN의 승인을 받기 위해 UN에 요청을 했던 것이다. (이 행동때문에 트루만은 나중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한국에 대한 지원 결정, 유엔군 파견 등 일련의 조치는 미국이 건국이래 약 200여개의 전투 및 분쟁에 개입했지만 한국전처럼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이며 단호한 조치를 내린 적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파병을 전격 단행한 이유를 물었는데 그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킬 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6.25 발발직후 빌리 그래함 목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구하기 위한 결단’을 촉구했음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의 자서전인 `Just As I am`을 통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김일성의 위협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보가 트루먼의 파병을 결정했던 모든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랬기에 Stalin은 Veto를 할 수 없었고, 동시에 중국(China)의 대표로는 중화민국(ROC)의 대표가 투표를 하였던 것이다.
UN군의 한국군 참전을 결정하게 된 안보리 결의(Resolution 82)가 통과된 뒤에 소련(USSR)은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투표는 무효라고 항의 했으나, 불참 또한 투표행위라는 논리로 거부될 수 밖에 없었다.
Resolution 82 (요약)
Calls for all hostilities to end and North Korea to withdraw to the 38th Parallel;
for a U.N. Commission on Korea to be formed to monitor the situation and report to the Security Council;
for all U.N. members to support the United Nations in achieving this, and refrain from providing assistance to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Calls for all hostilities to end and North Korea to withdraw to the 38th Parallel;
for a U.N. Commission on Korea to be formed to monitor the situation and report to the Security Council;
for all U.N. members to support the United Nations in achieving this, and refrain from providing assistance to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또한, UN군 지원을 위한 추가조치가 필요했으나 Resolution 82 이후 안보리에 참석한 소련(USSR)이 의장국이 었기 때문에 통과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때 미국이 사용한 논리는 '국제 평화 안보를 안보리에서 지키지 못하면 UN 총회의 결의를 통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UN의 의사결정 중 전무후무한 안보리가 아닌 UN 총회의 찬성으로 통과되는 결의(Uniting for Peace Resolution)가 채택되었다.
또한, 미국이 이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만(Truman)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으로 공산주의에 너무 온화하게 대응한다는 국내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특히, 중국을 공산주의에 '잃어버렸다'는 비난과 함께 과거 2차 세계대전의 뮌헨신드롬(서방국가들이 1938년 뮌헨협정으로 체코의 영토를 히틀러에게 양도해주며 온건한 정책을 폈던 것이 결국 나치 독일의 확장을 가져왔다)에 대한 반성이 강경한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트루만 대통령은 참전을 위한 국회 동의를 요청하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해서 바로 UN의 승인을 받기 위해 UN에 요청을 했던 것이다. (이 행동때문에 트루만은 나중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한국에 대한 지원 결정, 유엔군 파견 등 일련의 조치는 미국이 건국이래 약 200여개의 전투 및 분쟁에 개입했지만 한국전처럼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이며 단호한 조치를 내린 적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파병을 전격 단행한 이유를 물었는데 그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킬 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6.25 발발직후 빌리 그래함 목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구하기 위한 결단’을 촉구했음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의 자서전인 `Just As I am`을 통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김일성의 위협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보가 트루먼의 파병을 결정했던 모든 이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남북한의 전쟁, 그리고 UN의 참전까지.. 쉽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숨겨져 있었고,
모든 상황이 거짓말같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아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을 하나님이 '특별히'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도 아니고..
한국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선한 민족이기 때문에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57년전의 사건을 통해서..
한국이 열방을 섬길 제사장 국가로..
그리고 자기를 침략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민족으로..
기업 무를 자로서의 위치에서 북한을 끝까지 섬길 수 있는 민족으로..
그렇게 만드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6.25.. 이 일 때문에 북한을 증오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북한을 증오하지도, 미국을 숭배하고도 싶지 않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일은 북한, 중국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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