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정말 졸필이다..
단순화시키는 것은 역시 천재들의 일인가보다..
우리 사회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 구하기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 체제의 두 기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입니다. 이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입니다. 또한, 세계 많은 국가들이 이 두 체제를 공유하고 있고, 역사의 흐름은 이 두 체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우리 기독교인의 사상을 지탱하는 기둥은 단 하나, 신본주의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다른 기둥을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사회를 살아가야 할까요? 신본주의와 이 두 기둥은 대립되는 것일까요?
1. 민주주의 vs. 신본주의
민주주의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뿌리는 인본주의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 특히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통해 한 사회는 모든 인간이 통치해 나갈 수 있다라는 기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은 르네상스에서 태동한 자유주의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사상과 규율에 묶여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즉, 종교의 틀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 스스로 모든 사상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의 지배가 아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여러 혁명의 과정을 거쳐 그 국가를 지배하는 계층이 일부 계층에서 모든 국민으로 확장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 초점을 맞춘 민주주의는 신본주의와 항상 어긋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요셉, 다윗, 다니엘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평등’이라는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우리 기독교인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중에 하나가 ‘인권’입니다. ‘어? 인권이 뭐가 잘못된 거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권의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인권 중시 풍토로 인해 마치 인간이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권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각자 인간으로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이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인권운동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부분의 인권신장을 이루기도 했지만, 반대로 동성애 등의 성적문란, 마약, 가정파괴 등 인권을 빙자한 방종이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함정은 ‘다수’의 함정입니다. 민주주의는 그 체제의 특성상 의사결정의 방법을 ‘다수결’로 정합니다. 다수가 지지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채택되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인간의 이성을 믿기 때문에 도출된 의사 결정 방법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는 죄된 본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다수의 사람의 의견을 모아서 하나님께서 ‘죄’라 말씀하신 것들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열두 정탐꾼들 중 열 정탐꾼과 두 정탐꾼의 보고 내용이 상이하게 달랐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열 정탐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수의 의견이었기 때문입니다.
2. 자본주의 vs. 신본주의
다음은 경제체제의 기둥인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란 사유재산제에 기초를 둔 자유주의 경제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간단히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그리고 항상 사랑 받는 돈(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돈에 대한 욕심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에, 성경에 여러 번 돈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는 돈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은 그만큼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쉽게 재물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재물에 대한 금욕주의를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은 재물에 대한 새로운 건강한 시각을 가졌습니다. 돈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그로 인한 소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인식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역사적으로 20세기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공세와 맞서 싸웠습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고민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비등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달성될 수 없었고, 자본주의가 중시하는 효율성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것이 물질에서 비롯되었다는 무신론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성립된 사상이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절대로 동화될 수 없는 사상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그와 반대되는 자본주의를 선택했으며,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교회는 그 반목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이 특히나 심했습니다.
청교도들의 믿음에 의해 발전된 자본주의, 그리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자본주의는 과연 신본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자본’의 척도로 결정됩니다. 성공의 여부는 연봉의 액수로 결정됩니다. 생활의 즐거움은 집 가격이 말해줍니다. 공부의 목적은 몸 값을 올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의 관심은 ‘경제발전’, ‘부의 창조’에 있습니다. 국가의 비전, 목표, 방향성은 오로지 더 잘사는 것입니다. 정직과 성실, 정당성보다는 물질적 성공과 경제 성장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지도자의 주요 자질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념과 가치의 시대가 아닌 자본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보다는, 자본이 주는 좋음과 싫음을 중시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헌금을 낼 때 지갑에 만 원짜리만 있는 경우에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비싼 커피와 식사에는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지만, 구제, 선교 헌금에는 인색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 당장의 시험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경건의 삶을 지키는 것 보다 주위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이 더 중요합니다. 매일 하는 기도는 돈을 바라고 성공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요한 재테크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위대한 효율성을 자랑합니다. 자본주의 때문에 인류의 삶이 이만큼 윤택하여지고 많은 문명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 모일수록 사람들이 이기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치고 돈을 더 많이 모으고자 합니다. 예전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있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바라고만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들 아직 자기 자신은 돈이 없다고 말하며 더 많은 돈을 원합니다.
자본의 유혹과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신본주의에 의지해야 하는 기독교인도 쉽게 원래의 목적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되레 과거의 금욕주의가 그리울 정도로 부에 대한 방종이 너무나 당연하게 표현되는 것이 신본주의를 잊게 하는 현대 사회의 큰 문제입니다.
3. 신본주의로의 회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두 기둥 그 자체는 인간의 멋진 발명품입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서 인류 문명은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고,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낸 좋은 제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두 기둥에 어떻게 사용했느냐 입니다. 두 기둥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나’를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신본주의의 기둥에 먼저 의지하는 것, 그것이 이 사회의 두 기둥을 선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권리’를 내세워서 바꿀 수 없습니다. ‘다수’의 주장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리인지 고민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인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20대의 우리에게는 각자의 전공을 통해 평생 동안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숙제입니다. 우리의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숙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확실히 세워진 사람입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모두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는 아낌없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2~35)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신본주의 사회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모습, 가진 자들이 기쁨으로 나누어주고, 받은 자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 이는 공산주의자들도 좋아할 만한 사회의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를 고민해 왔습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과 결과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은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초대교회 공동체에 임하였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행동하였습니다. 특별한 사회제도가 없었지만 신본주의에 따라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도 현실의 여러 핑계를 대며 위와 같은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이 사회를 신본주의의 사회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 삶부터 신본주의의 삶으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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