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 감사란, 모든 환경 속에서 적합한 것. (Proper in every occasions)
 
     - 감사는 명령이다. 
     - 모든 상황 속에서 무조건 감사를 찾아라!!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반드시 보라..
     - 믿는 자들은 습관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 다음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 우리는 '현재'까지 일어난 일만 안다. 우리가 본 만큼 밖에 모른다. 
     - 모든 상황에서 감사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것. 


•  감사란, 내 삶에서 넘쳐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기도와 같이 간다. 
 
     -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다.  
     - 감사와 기도, 기쁨은 항상 같이 간다. 
     - 골 3:15~17 :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감사가 넘쳐난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을 알라. 
     - 골 4:2 : 기도 가운데 깨어있으라. 

     - 내 삶에 감사, 불평 중 어떤 것이 더 많이 들어가는가? 감사는 넘쳐나야만 한다. 
     -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 감사해야 한다. 

     -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한다. 그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봄'. 
     - 기도와 찬송, 감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적군을 치기 시작하심. 


• 감사란, 기쁨의 비밀이다. 

     - 골 3:15~16 : 감사는 기쁨으로 발전된다. 
     - 살전 3:9~13 : 감사가 없으면 기도가 없던지, 기쁨이 없다. 
     - 빌 4:4~6 : 기뻐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참 기쁨은 사람에게서 올 수 없다. 오직, 주님께로부터만 온다.

     - 상뢍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 무엇을 감사할지를 결정하고, 불평에서 감사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 감사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때 계속된다.
     - 감사를 선택하는 순간, 인생의 태도가 변한다.

     -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성품: 감사, 기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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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8월 2일) 하용조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작년 옥한흠 목사님에 이어서 또 한명의 영적 거장이 이 세상을 떠났다. 

하용조 목사님과의 첫 만남은 책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때 학교 앞에 있는 서점에서 집어들게 된 하목사님의 '사도행전 강해'..
입으로 늘 말씀하셨듯이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시던 그 분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었다.

'선교하는 교회', 'Act 29'.. 
온누리교회의 구석구석에 보이는 그분의 열정은.. 
그저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만들어진 교회가 아니라,
그분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대로 사역할 수 있었던 교회임을 보여준다.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항상 '저기에 내가 가야하는데..'라고 아쉬워 하시던 모습은 방관하고 있는 '보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보내는 선교사'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꿈이고, 하나님의 소망이기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회의적이거나 무리라 할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셨기에 가능했다. 
참으로 영적 거장이다.. 



옥한흠 목사님과의 만남은 잊을 수가 없다.
처음 교회를 내 손으로 정해야 했던 순간.. 사랑의교회 예배를 처음으로 드리던 때가 기억난다.
예배를 시작하며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 두 손을 들고 아이처럼 찬양하시던 옥 목사님의 모습..
그 모습에 감동받고 교회를 정하게 되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매 설교시간마다 보여주셨다.
멋있게 말하려는 미사여구도,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예화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외치시는 설교에는 힘이 있었다. 



특히, CAL 세미나의 첫번째 강의를 언제나 장식하는 '광인론' 강의는 잊을 수가 없다.
예수에 미치고, 제자훈련에 미치고, 교회에 미치고, 성도에 미친.. 
수동적이기만 한 평신도들을 깨우고, 평신도들과 함께 사역하는 교회..
지금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얘기지만, 모두가 선뜻 나서서 하기 힘들어 했던 그 때에..
성도들 한명 한명을 붙잡고 제자훈련으로 주님의 제자되어 살도록 하신 열정.. 

생의 마지막에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 서기 부끄럽다고 하시던 모습..
이 땅에서 너무 과분한 칭찬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 칭찬 안 해주실 것 같다며 걱정하셨다는 일화는..
이분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자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참으로 영적 거장이다. 


이렇게 점점 한국의 복음주의 1세대 목회자들의 역할이 점점 끝을 맺는 것 같다. 
그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배웠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아직도 그 교회에서, 그리고 그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려면.. 
그렇게 배운 내가 그 열정을 이어 받아야 한다. 

그토록 예수를 닮고 싶어했던 모습.. 
그토록 복음 들고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모습..
그토록 한명 한명 제자로 세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했던 모습.. 
남들이 모두 '아니라'고 할 때,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모습..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 
그 수 많던 육체의 가시.. 이제 모두 내려놓고.. 그토록 사랑하시던 주님 품에서 빙그레 웃음 지으시길.. 
목사님들의 열정은 이제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보여주신 수 많은 모습들.. 간직하겠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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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청년부 목사님께서 꼭 읽어보라는 추천에 사게 되었는데,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미국에서의 4년째 생활을 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영혼들을 진심어린 사랑으로 섬기고, 기도하고 섬겨주는 모습.. 
말씀에 사로잡혀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말씀 묵상과 찬양을 통해서 스스로를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는 삶..
내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섬길 줄 아는 겸손함.. 
그리고.. 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까지.. 

예수를 알기에.. 그분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기에 가능한 거라 생각한다.
피상적으로,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대로 그분이 자기 안에 살고 있기에 그대로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 뿐인 인생 즐기며 보내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크리스찬은.. 
'한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라고 말해야 한다.

최근 몇년간 무뎌진 내 신앙은 그리스도를 묵상하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그리스도가 먼저인지, 내 상황이 먼저인지 주저할 때마다 내 신앙의 깊이는 얕아진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 수록, 하나님께 베팅하면 할 수록, 믿음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책 중에 다음 부분이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남을 의식하면서 생활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면서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한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 한마디에 모든 시름을 잊고 몸을 던져 일하기도 하고, 의미 없이 내뱉는 비판에 모든 희망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더 큰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달음박질하고 때로는 남을 깔아 뭉게기도 한다. 현대는 경쟁사회이며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기 마련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고 깊은 호의를 보이면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해한다. 사람들의 환대 이면에 숨어있을 속셈을 계산하면서 '과연 저 사람들이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며 자신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채찍질하게 된다. 다른 이들의 칭찬이 우리 존재 가치를 결정할 때, 또 내가 계속 내 삶의 방향을 이끌고 가려 애쓸수록 피곤하고 고단한 삶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단 한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다는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린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 사랑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고, 그 고백을 내가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이렇게 살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이 있음에 감사하다. 
굳어진 마음이라면 아무리 강한 메세지라 하지라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의 삶이 이수현 형제처럼.. 그렇게 예수를 닮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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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17:19

서울에 왔다. 전혀 새롭지 않은, 그러나 늘 새로운 도시.. 

나에게 서울은 늘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두 얼굴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지는거 같다. 
나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도시인 동시에 매우 조심스러운, 그래서 선뜻 다가가기 힘든 도시이다.

서울은 너무나 편한 곳이다. 교통도, 서비스도..
필요한 것들이 근거리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 마저도 인터넷과 유통기술로 더욱 촘촘히 메꿔진다.
세계에서 크다는 도시인 뉴욕과 도쿄보다도 어찌보면 더 도시적인 요소가 가득한 곳 같다.
게다가 곳곳에 숨겨놓은 역사의 숨결과 자연의 자취는 부족하지만 도시에 영혼을 불어 넣고 있는 듯 싶다.

반면.. 서울은 갑갑함이 느껴진다.  
모두가 모두를 신경쓰는, 아니 신경쓰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서로의 행동에, 옷차림에, 태도에, 위치에... 뭔가 내 스스로를 비교하게 만드는 비교표가 온 도시에 붙어있는 듯 싶다.
도시는 매우 편한데 삶은 편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뭔가에 쫓기고 있으며 남들의 감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듯.. 
빠른 삶의 속도로 인해 사람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아 도시의 기운에 조종당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래서일까..
한편으로는 서울에 너무 살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울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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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도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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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7 19:29

    한국은 편리한 지옥이라지? ㅋ


Tweeter로 날라온 "Don't miss President Obama's live stream from Facebook HQ"..
오바마가 Facebook HQ에서 토론(?)을 하는 것을 Facebook이 생중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Facebook 직원과의 대화"랄까.. 

오바마의 연설은 워낙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즉흥적일 수 밖에 없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에도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정확한 주장을 내놓는 것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지도자는 말을 잘해야 리더십이 살아날 수 있다.

꽤 오랜시간동안 진행되었지만 주제는 몇가지 안되었다.
Tax & Budget Deficit, Health Care, Immigration, and Education. 

오바마가 돋보였던 것은 그의 철학과 대통령의 역할에 충실했던 부분이다.
모든 부문에서 그의 목표는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었다. Tax 문제에서 부자들에 대한 감세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 자원으로 Energy나 Infrastructure에 투자하기 위함이었고, Health Care 문제에서도 누군가에게 Cost를 떠넘기기 보다는 그 Cost 자체를 줄여서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있었다. Immigration에서도 함께 자라고 미국인으로 교육받은 자들이 Job creator/generator가 될 수 있도록 legalized system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췃고, Education에서도 결국 단순히 돈을 더 주자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주면서 어떻게 reform 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중간에 어떤 Facebook 직원이 최근 Paul Ryan의 감세 법안이 bold 하고 courageous 하다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오바마는 Paul이 sincere한 사람이고 patriot임을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얘기한 뒤에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했다. "It’s not courageous to solve problems on the backs of uninsured people." (보험이 없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다)

모든 정치적 문제가 그렇듯이 국가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서로가 있기에 서로가 존재할 수 있다. 그 공동체성을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희생을 해야하는 것이며 국가가 필요한 사람들은 받은 혜택 만큼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대부분의 자신의 주장을 마칠때 마다 "Government alone can't do this!", "I can't do this by myself"라고 했다.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국에도 이런 지도자가 다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더욱 간절해졌다.

마치면서 Facebook 후드티를 대통령에게 '포장 없이' '한 손으로' 선물이라며 주는 Mark Zuckerberg의 센스하며..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그 흔한 타이틀 하나 없이 뒤에 엄청 커다랗게 "Facebook"로고를 붙여 놓는 문화.. 확실히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근엄하고 다가가기 힘든 왕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파트너로 여겨지는 듯 싶다. 참 부러운 문화다.. 


P.S : 오바마는 기름값이 1Gal에 얼만지 알던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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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creditor shall cancel any loan they have made to a fellow Israelite.” (15:2)

This chapter is very interesting to me in the sense of economics. This rule is very hard to be accepted in modern economics. (I don’t know how well it was accepted in ancient times).

In the view of an economist, this rule is uncomfortable in two ways:

1. Moral Hazard : Knowing he will be released in the seventh year, the borrower will not pay back the money for other six years. 

2. No loan at all : Knowing the Moral Hazard problem, the lender will not lend any amount of loan to anyone, because he knows he cannot be paid back.

We make all concerns toward borrowers that they will not pay back. So, it’s very reasonable to warn borrowers to repay in time. However, God warns lenders rather. He tells them not to be hardhearted or tightfisted toward borrowers, and also “commands” them to be openhanded. 

This is the God’s way, very different from the worldly way. He cares the poor and the weak more, because they know they cannot live without God. The rich and the strong rely more on what they have now rather than on God. Thus, God commands them to put down what are in their hands.

Don’t forget! The Word clearly says that there should be no poor among us if we fully obey God and follow all the commands of God. The poverty in the world is the result of “our” sins, not that of the poor. So, no one can blame the poor for their con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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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5 10:08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라는 책을 추천해. 신부님이 썩 그리 학자스럽게 쓴 책은 아니고 경제학 학사의 머리로는 이게 현재도 실현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볼 주젠거 같아. 사회정의 구현의 일부로서.

    • 2011/05/17 17:01

      그 책 읽어봤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지..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현 system에 얼마나 내 사고가 묶여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며 내 삶의 영역에 실천하는거.. 어려운거 같아..
      그만큼 내 삶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내려놓아야 하니..
      Anyway.. Thanks!


요즘 QT 본문이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신명기여서인지 아침 묵상이 신난다.
나와 너무 비슷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여서인지 더 공감도 되고 내 자신을 비춰볼 여지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신명기 1장 19절~46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때 나타나는 우리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보아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낸 뒤에 정탐꾼이 "It is a good land that the Lord our God is giving us."(신1:25)라고 본 것을 말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약속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믿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명령하신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다'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내 생각'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에 더 믿음이 간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약속의 증거를 '보아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불순종의 열매는 '불평'과 '원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당연히 따라오는게 '불평'과 '원망'이다. 거꾸로 말해서 내 삶에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죄를 지은 아담의 첫번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러기 때문에 또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왜곡'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멸하시려고" (신 1:27)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순간 우리는 '불평', '불만',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왜냐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 되심을 신뢰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반응은 짜증섞인 투정일 뿐이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는 순간.. 지금까지 고백해온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이전의 고백과 모든 감사의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고, 뭔가 안 풀렸던 일들, 안 좋았던 일들만 생각나게 된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상기시킨다.

4. 참된 회개를 못한다.

모세의 질책과 하나님의 노하심을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회개한다. (신 1:41)
이는 참된 마음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닌 '두려움'에 잠시 굴복하는 회개일 뿐이다.

이는 회개 이후에 나타난 그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겠다는 행동이 아닌, 다시 '내 생각에 옳은' 행동을 하게 된다.
40년 동안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그게 싫으니까) 어떻게든 지난 죄악을 만회하고자 고집을 피우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이 절대로 못하겠다던 일을 한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내 느낌에 '좋다' '싫다'에 따라 행동하는게 우리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옳은것'을 하기를 원하시고 '틀린것'을 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좋아함'과 '싫어함'에 상관 없이.. 


신명기 QT를 하면서.. 모세의 '설교'이기 때문에..
그냥 Audio Bible을 틀어놓고 듣는 것 만으로도 은혜가 된다.
나에게 바로 말해주는 것 같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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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참 바쁘다.

그나마 다행인건.. 분주하다는 느낌 보다는 그냥 바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바쁘다 보니 제일 먼저 안하게 되는게 독서와 글쓰기이다.

독서가 없다보니 생각이 점점 고립되고 획일화 되어가는거 같고..

글쓰기가 없다보니 생각이 논리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없어져 가는거 같다.

그렇다고 뭔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대화할 환경도 없고..


철학이 없고 생각이 없으면 항상 '그때그때' 대응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순간에는 넘어가는거 같지만, 뒤돌아 보면 한참 삐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공부를 하면서도 생각없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제만 처리하려고 하다보니 (특히 MATLAB)

겨우 공부를 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몇년 지나가면 '준비'보다는 '방관'을 하고 있었다는 후회를 갖지 않을까 싶다.

도구를 손에 쥐기는 했지만 어떻게 써야될 지 몰라 냅다 휘두르기만 하지 말아야 할텐데..


시간을 쪼개서라도 읽고.. 쓰자..

그래야.. 생각이 굳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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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수련회를 앞두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누구를 위해 공부하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 되었다..

왜 경제학을 공부하게 하셨을까? 누구를 위해 공부하라고 하시나?


"나의 사명은 이방의 빛으로서 모든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꽂아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임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권위 있는 경제학자가 되어 저개발 국가의 경제 개발을 돕고, 특히 북한의 경제 회복과 남북의 사회 경제적 통합을 위한 정책을 만들 것이다."

이 사명선언서에 맞게 공부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뿐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시선은 90%의 세상이 아닌 10%의 세상을 보게 한다.

마음 한켠에 90%의 세상에 진 빚은 잔뜩 있는데, 주변의 환경과 현실 등을 핑계로 10%의 세상에 신경을 쏟게 만든다. 

마치 모든 경제가 10%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처럼... 


'사랑의 경제'를 그려보고 싶다. 90%의 Nobody들을 Somebody로 대우하는.. 그런.. 

결국.. How?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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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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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적는 송구영신 Note.. 

올해는 "2010년을 되돌아 보며 2011년의 큰 틀 세우기"이다.. 


10년도 넘게 지우지 않고 남아있던 기도제목 중 한 개가 지워졌다. '배우자 위한 기도'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으니 감사의 제목란으로 옮겨졌다.  


그 밑에 보이는 '나 먼저 준비된 배우자 되기'

나는 위의 기도를 하며 얼마나 준비된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까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내가 누군가의 남편으로, 한 가정의 영적 가장으로 서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른 것이 보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가 '해야' 하는 분량이 다 차기도 전에 기도제목을 '먼저' 응답해 주셨다.


이렇게 또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 

내 삶의 모든 부분은.. 내가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다'.. 


그래서 여러모로 하나님께 죄송하고 부끄러운 2010년이지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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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김일승 목사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요즘 목사님이 내 마음을 읽고 계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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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악으로 하나님의 생명력이 단절된 인간에게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욕망은 영혼의 공허감과 불만족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입니다. 욕망 때문에 인간은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욕망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반역과 저항으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욕망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싶어 하고, 자기 뜻대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표출됩니다. 욕망 때문에 경쟁과 다툼이 생기고 인간관계는 깨어집니다.

  욕망은 반드시 분노를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욕망을 이루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욕망을 부리다가 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분노가 내면에 축적됩니다. 나이가 들면 더 강하고 높은 사람들 아래에서 억압을 당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노가 쌓입니다. 욕망이 큰 만큼 분노도 더 많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나쁜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는 욕망과 분노가 동시에 큰 부모입니다. 욕망이 크다는 것은 자녀에 대한 기대와 자기 뜻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크다는 것은 자녀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폭력을 자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억압과 폭력을 반복적으로 받은 자녀는 마음에 억압된 분노를 차츰 쌓아가게 됩니다. 많은 경우 춘기 때 이런 억압된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욕망과 분노가 너무 큰 부모 밑에서 완전히 마음이 파괴된 아이들은 이 시기에도 제대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마그마와 같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쌓여진 분노는 결혼과 자녀 양육의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자녀 양육의 과정에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욕망에 영혼이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끝이 없는 요구 앞에서 부모의 욕망에 의해 눌렸던 내면이 자극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자기가 받았던 것보다 더 심한 극단적인 분노와 폭력을 자기 자녀에게 행사하게 됩니다. 자기도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한 채로 아이의 요구와 욕심에 갑작스럽게 폭발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규율을 정해놓고 그것을 어기면 무섭게 체벌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화를 내고 때린 후에 후회하고 눈물도 흘려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의 중심에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욕망을 통해 눌릴 대로 눌린 무서운 분노의 응어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분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낸 욕망과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대를 이어 계속 전이됩니다. 이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죄악을 용서하고 자신의 분노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은 드러나게 화를 내고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화를 내는 것도 자녀가 말을 듣지 않고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좌절된 욕망이 만들어낸 죄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악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 대신 세우시고 죽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믿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회개하며 자신의 내면에 쌓여진 분노가 얼마나 무섭고 악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능력이 내면의 분노를 서서히 녹이고 파괴하게 되면 결국 이 죄악의 근원이 파괴되어 무서운 욕망과 분노의 사슬에서 놓임 받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악을 끊으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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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posting 하는 글인데 퍼온 글이라 조금은 부끄럽다.
하지만 요즘 고민하며 기도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인데다가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줬기에 퍼온다.

김일승 목사님 홈페이지 묵상의 숲(kissdei.cyworld.com)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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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기독교의 모습은 두 가지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성공주의는 영웅주의나 물질주의적인 모습으로 표출되며 세상적인 힘과 풍요를 추구하는 세속주의가 종교화된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영성을 병 치료, 은사, 기적과 같은 가시적 현상만으로 축소시킨 것으로 기복주의를 그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성공주의와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들의 죄성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며 현대의 시대 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지금과 같이 성공주의나 신비주의가 유행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현대가 물질문명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질문명의 사생아처럼 등장한 물질주의는 사람들의 가치를 전부 현세에서의 성공과 풍요로 축소시키고 말았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진리요 규범이라고 여기던 것들을 파괴하면서 가시화되지 않은 영적 세계와 신비한 세계에 대한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성에 대한 추구는 감성적 체험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진정한 영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가 본질을 상실하고 힘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영향을 받아 뒤틀리고 기형적인 모습의 성공주의와 신비주의만을 추구하는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그 공허감과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힘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주의적 기독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에서도 힘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며 큰 힘을 소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기도만 하면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과 말의 선포로 놀라운 세상적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복주의를 배경으로 한 신비주의는 기적을 통해 단번에 문제가 해결됨으로 이익도 얻고 믿음도 자라기를 추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병을 치료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임으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언을 받아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알면 신앙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해 금이빨을 만들어 주시거나 금가루 등을 뿌려주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많이 기도하면 천사나 귀신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영적 권세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모든 직분이 말세에는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은 사도라는 직분을 다시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죽어버린 흙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며 자아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 성장한 자아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 자아가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해 옛 자아가 원하는 세상의 힘과 풍요에 대한 갈망과 의존을 전부 잘라 버리십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만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숙해질수록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가시적 증거보다는 믿음으로만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아의 깨어짐은 더 깊어지고 눈에 보이는 증거대신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야 정상입니다.


세상적 가르침들은 죄악에 대한 회개와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매혹적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풍요롭고 힘 있게 살고 천국에서도 지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적 풍요와 세상적 힘을 통해서는 절대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과 세상적 힘에 대한 의존이 잘려나가고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될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고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말씀과 은혜로만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성공주의와 신비주의적인 기독교는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점점 희석되어 가는 이 시대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새엔가 '다른 복음'을 믿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거짓된 복음이 난무한 이 시대에 참된 복음이 교회마다 선포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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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기 그지 없지만 파멸로 이끈다.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삶은 힘들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삶은 더 없이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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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소명, 사명, 비전" 이런 단어들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뜻도 왠지 비슷해 보이고 해서, 교회에서 거의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어딘가에 정확한 definition도 없기 때문에, 목회자 분들끼리도 서로 각자의 정의에 따라 사용하신다.

  고등부, 대학부, 그리고 사랑리더십아카데미를 통해서 얻은 교훈 등을 가지고 나름 스스로 이 세가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냥 내 마음대로 내린 것은 아니고, 말씀을 바탕으로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내 스스로 나의 사명은 무엇이고 비전은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생기고, 각각에 맞추어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는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I. 소명(Calling)

  오스 기니스는 그의 저서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소명을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


  조금 추상적이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과 '그분을 섬긴다'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말씀으로 본다면 이 두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인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53: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53:21)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소명을 가지고 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모두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에 모두 십자가 아래에서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동일한 부르심'이지만 이 부르심은 '위대한 부르심'이기에 그 누구도 흔들수 없는 '강력한 부르심'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3~34)

  오스 기니스는 기독교가 소명을 '직업'으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했다. 즉, 우리는 종종 "나는 ~가 되는 것으로 부름 받았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부르심' 보다는 '무엇으로'에 더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일차적인 소명은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이차적인 소명은, 삶의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하는 것이다. 이는 '직업' 그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 답게 행동하는 가가 더 중요함을 말해준다.

  정리하자면 소명은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르심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에 맞게 반응하면 되는 것이다. 


II. 비전 (Vision)

  이 비전이라는 단어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며 너무나 많이 남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전=직업=꿈'과 같은 단순한 관계로 인식되어 "넌 뭐가 되고 싶니?"의 교회 version이 "너의 비전은 무엇이니?"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비전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우리가 보는 무언가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무언가이다.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이다. 마치 우리가 퍼즐을 맞출 때 완성된 그림을 상상하며 맞추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비전이다.

  궁극적인 비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에서의 예배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한때 한국에서 열풍을 불었던 '비전'이라는 찬송이 그래서 이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에서의 예배이자 모든 믿는자들이 부르심에 가장 합당한 삶을 사는 모습인 것이다.

  이 요한계시록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우리 삶의 자리에 이뤄질 것을 꿈꾸는 것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비전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단순하다.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꿈꾸는 것, 북한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는 것 등등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이 있다. 현실의 모습을 봤을 때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완전하게 회복된 모습을 그리게 하시는 것이 바로 비전이다.

  결국 이 비전을 꿈꾸며 살기에 우리의 삶에는 '목적'이 생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개인 각자에게 맡겨진 일의 분량이 있다. 그것이 바로 비전과 사명을 연결시켜주는 링크이다.


III. 사명(Mission)

  사명은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소명이 없는 자들에게는 사명이란 있을 수 없다. 사명의 기본 바탕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움을 받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사랑의교회 공동체 고백 中)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때, 그 누구도 아무 이유 없이, 목적 없이 보냄을 받지는 않는다. 모두가 보냄을 받을때 그가 일생동안 해야할 일에 대해 적힌 사명장을 받고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명은 우리의 '직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직업 그 자체가 사명은 아니다. 단지 직업은 사명을 이루는 도구가 될 뿐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 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사명이라면 음악가, 작가등의 직업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또는 직업과 사명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자신의 직업과 관계 없이 주일학교에서의 봉사를 통해서 그 사명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사명'은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다시 세상으로 보내실 때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명장을 펴 보면 우리가 왜, 무슨 이유로 이 땅에서 사는지를 알 수 있다. 사명장을 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의 초반부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자신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발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발견하는냐가 아니라 '발견했는가'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여 사명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 전체이다.

  흔히 자신의 사명과 비전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 스케일이 큰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간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그런 거창한 사명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간증을 듣고 나면 그 순간에는 큰 도전을 받지만, 자신의 현실과 비교해 봤을 때 느껴지는 큰 괴리감으로 인해 다시 무기력함에 빠지곤 한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성공스토리를 듣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명의 위대함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얼마나 그 사명을 좇아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IV. 소명, 비전, 그리고 사명

  그렇다면 이 세가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가장 먼저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세가지 모두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보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꿈꾸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억지로 사명을 만들어내고 비전을 지어내는 노력을 해야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소명 또한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꾼다. 우리가 다 그릴 수도 없는 그 위대한 꿈 가운데 일부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우리는 그 비전을 품고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산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소명, 비전, 그리고 사명을 묵상해보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의 소명을 받았다.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7:15)
  그리고 바울은 모든 서신서에서 각 교회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바울은 순교의 길을 떠나며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이처럼 바울은 부르심에 순종했고, 비전을 붙잡았으며, 사명따라 산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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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4 09:54

    비밀댓글입니다

    • 2010/04/24 13:54

      난 내가 글 잘쓰는거 같지도 않은데..
      말씀도 잘 못 읽고 있고..
      하나님과의 대화는 더더욱이나 요즘 꽝인데..
      흠..

  2. 2010/09/20 15:49

    참 좋은 글 이네여


보스턴의 날씨 만큼이나 변화 무쌍했던 10여일이 지났다..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이 일어났고..
처절하다시피 힘들어하며 나의 밑바닥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총 6주 정도의 시간..
마치 신병 훈련소에 갔다 온 것과 같이.. 폭풍처럼 내 삶을 뒤흔들고 지나가 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기가 막혀서 하나님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나 할까..
그냥.. 할 수 있었던 말은.. "Why?" 한 단어였다..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마냥 잘 될꺼야.. 괜찮아질꺼야..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게 무엇을까.. 분명히 있을텐데..
나를 이끌어가시는 방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늘 예배시간.. 마지막 축도때 말씀을 보며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5:13)


미국으로 떠나올 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제자훈련'..
수련회 때 기도 받았던 '내 앞에 놓인 많은 test 관문들'..

지난 2년여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 Test를 시키셨다. "너는 나를 믿니?"라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힘들때마다 나는 "네"라고 대답하는 훈련을 받았고.. 그것을 이제는 진심으로 고백하게 된 것 같다.

이번 어려움 속에서 나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더 강하게 믿게 되었다.


다음 Test는 무엇일까.. '소망'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행하실 일들을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것..
느헤미야가 자신의 비전을 향해 달려갔던 것 처럼,
바울이 뒤에있는 것은 잊고 오직 한일 앞에 있는 것만 보며 달려간다고 했던 것처럼..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도로에서 사고를 안 낼수 없듯이..
'믿음'에 대한 test를 어느정도 통과했다고 해서 내 삶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항상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골목길에서 운전 연습을 하는 것에서 떠나..
면허시험을 통과함으로 highway를 달릴 수 있는 소망함을 가졌다고나 할까....


얼만큼까지 꿈을 꿀 수 있을까..
김하중 대사님처럼.. 정진호 교수님처럼..
얼마나 소망하며 살 수 있을까.. 얼마나 기대하며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기에'.. 이젠 소망할 수 있다..
아마도 이제 크게 그려보라고 백지와 펜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신 것 같다..


사명선언서에 적었었듯이..
가정에 대한.. 공부에 대한.. 열방을 향한..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더 크게.. 더 원대하게..

아마.. 지금 내가 소망하는 그 만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 같다..
최대한 크게.. 최대한 공의롭게.. 최대한 아름답게..
꿈꾸자..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자..


기대감이 한 순간에 무너짐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어했던 나를 보며..
이번 Test가 소망에 관한 것임을 알게된 것은.. 참.. 아이러니 하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God is good all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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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티 태스킹에 약하다.
특히 '생각', '집중'의 부분에서는 다른 것과 멀티를 하지 못한다.
눈으로 보면서 들을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을 듣는 것과 함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 안타깝게도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면 내 집중도는 뚝 떨어진다.

그래서 주변에 멀티 태스킹이 가능한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워했었다.
쉽게 빠른 시간내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봐도 부러웠었다.

내가 찾은 해결방법은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어떤 것을 먼저할 것인가 정하고,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를 해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본성은 그것과 반대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Franklin Planner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독한 놈이라고 했지만,
나는 내 본성이 그와 다르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서 사용했던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기대하는 삶의 모습에는 한참 떨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내 안에 그런 짜여진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것이 내 스스로를 얽매는 것 같고, 그냥 편하게 내 모습 그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것이 군대를 다녀온 뒤 정도부터인 것 같다.
자유해지고 싶다는 핑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이후 내 삶은 솔직히 엉망이 되어있다.
짜임새있는 삶 보다는, 그때그때 닥쳐서 뭔가를 하는 deadline의 삶이 되어버렸다.
더 무서운 것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이미 '편함'에 익숙해지면 다시 '불편함'으로 돌아가기 힘든것 처럼..
나 또한 다시 돌아가기가 너무 힘들다.

요즘 더 많이 느낀다.
미국에 와서 정말 내 스스로 control 해가며 해야할 것들이 많음에도 뭔가 내 삶은 계속 급박하게만 돌아간다.
그로인해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다가 한번에 긴장이 다 풀리는 롤러코스터의 삶..


삶의 우선순위는 신앙에 직결된다.
영적인 변화는 영적 습관에 달려있다.
그리고, 영적 습관은 삶의 우선순위에 달려있다.

청교도의 삶.. 그들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삶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았던 자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그것을 먼저 행하며 살았던 자들이니까..

청교도들의 삶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게 나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조금씩 닮아가려고 아둥바둥은 해야지..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삶..
요즘 나에게 너무나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원하시고 계신다..
내 앞에 준비하고 계시는 수많은 훈련과 시험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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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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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31 19:18

    나도 멀티가 안되거든. 근데, 여자들이 멀티가 잘 되잖아. 이유가 있더라고. 좌뇌와 우외를 연결하는 케이블이 있는데, 여자들이 남자에 비해 굉장히 굵어서, 여자들은 양쪽 뇌를 다 써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데, 남자들은 한 쪽만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용량이 부족해서 한 번에 하나만 한다고 하더라고. 남자들은 사냥감을 하나 보고 집중해서 잡도록 발달했고, 여자들은 집에서 얘 보면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렇다면 집에서 밥하고 애 보고 빨래하는 공부까지 하는 나에게는 굉장히 악조건이지. 컴퓨터처럼 메모리를 사다가 더 끼워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 2010/04/01 00:49

      음.. 나의 미래를 보아하니 너와 별반 다를께 없는지라..
      나는 굵은 케이블이 필요하겠군..
      이런거 보면.. 여자들이 참 잘 만들어진거 같단 말이야 ㅋ

      여튼.. 여러 일 한번에 하느라 고생이 많다. ㅋㅋ
      우리 언제 만나야 할텐데..
      필리 따땃해지면 함 가마~~ ㅎㅎ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고 선포를 해 놓은지라.. 그 선포가 믿음에 바탕을 둔 선포라면, 뭔가 올해 일어나겠기에..
정신차리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쩍... 그래서 간만에 김일승 목사님 말씀을 다 뒤져 읽어봄..
근데 정말 길다.. @.@


다음은 김일승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kissdei.cyworld.com)
(밑줄 그어진 부분은 제가 임의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표시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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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결혼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선택입니다. 한 번 선택한 뒤에는 무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것이 결혼입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또한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기 때문에 실패가 없는 선택을 위해 여러 상황들과 사람들을 비교하며 고민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교와 고민을 많이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대부분의 결과는 비슷합니다.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하면 더 행복하고, 쉽게 결정하면 불행해지는 공식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 결혼입니다. 자신과 꼭 맞는 사람과 결혼하면 갈등이 없고,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갈등이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배우자를 선택하기 전에 세속적인 가치들과 영적 가치들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성경적 가치관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정 안에서는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는 결혼사진을 찍을 때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아름다운 외모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결혼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연예인들의 결혼이 수없는 외도와 이혼으로 얼룩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행복하게 만들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돈, 외모, 학력, 집안의 배경 등이 아닙니다. 결혼은 희생, 인내, 섬김, 복종, 겸손, 온유를 통해만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기본적인 외적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내적 조건들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외적 조건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내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그래서 배우자의 선택이 더욱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 가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세상적인 조건이 대충 맞으면 쉽게 결혼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은 세상적 가치뿐 아니라 영적 가치와 신앙까지도 갖춘 사람을 찾기 때문에 결정이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세상적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에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추인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게 됩니다.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소망한다면 영적 가치를 위해 세상적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이 먼저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갈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구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많은 조건들을 따지는 이유는 갈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사람을 찾는 사람은 성격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있을 갈등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과 성격이 다른 사람을 찾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약점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비슷한 실패를 반복하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결혼의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고려하는 대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수고는 결혼한 뒤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 활달한 성격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는 답답하다면서 집 밖으로만 배회하는 배우자 때문에 고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격이 차분하고 안정적이라서 결혼했는데 이 사람이 가까운 사람에게만 쌓아둔 분노를 폭발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똑똑하고 정확해서 결혼했는데 배우자에게도 정확성과 획일성을 요구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고민한 뒤에 결정해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결혼은 갈등과 실패가 없는 행복과 기쁨만이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결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가장 큰 축복과 선물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친밀감입니다. 하지만 결혼의 깊은 친밀감은 자아를 결혼이라는 제단에 바치는 희생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자신의 자아를 타자를 위해 포기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하나님 과의 관계의 친밀감도 얼마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죄성으로 똘똘 뭉친 두 사람이 만나 깊은 친밀감을 얻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갈등과 깨어짐과 용서와 회복의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지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얼마나 반복적으로 경험하는가가 친밀감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부부는 깨어지지 않은 자아를 가지고 서로 타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는 결혼이 가져오는 친밀감의 깊이와 만족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결혼은 깨어진 자아가 서로 연합되는 과정에서 타인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된 존재의 기쁨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갈등과 실패만이 결혼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관계의 갈등과 실패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야기합니다. 또한 인간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죄성의 깊이 또한 더 깊어집니다. 친밀감의 욕구와 사랑은 잠시 자신의 내면을 감춘 무장을 해제하게 만들지만 이것은 더 깊이 상처받을 수 있고, 고통을 받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갈등이 어느 다른 갈등보다 깊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한 몸이 되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이 원수보다 더 심한 관계로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겠다고 결혼한 사람을 향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의 유일한 소망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완전히 깨어지고 무너져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운다면 실패는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원과 지혜가 의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적 성취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결혼이 그렇습니다. 깊은 친밀감을 원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자아의 깊은 죄성이 드러나고 충돌하는 곳에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매어달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부부의 갈등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깨닫는 영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로나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를 얻길 구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일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중요한 문제에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이미 그것을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뜻이 강하게 서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자아의 욕구와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을 따르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라고 사인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문제만을 두고 아무리 금식하고, 새벽 기도를 해도 근본적인 영적 변화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결혼이나 진로의 문제에서만 하나님께 뜻을 간구하고 매어달리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자아의 포기가 없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화신이 우상입니다. 좋은 결혼을 위한 인도하심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욕망의 대상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 순간에만 간구한다면 이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닌 스스로의 뜻과 생각으로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뜻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문제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인간 자아의 깨어짐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두 남녀의 결혼을 축복하길 원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이 아담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도와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라고 순간적으로 고백했던 말을 이제는 넘치는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는 단번에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세속적 가치의 포기, 갈등과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자아의 깨어짐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가 선행되어야만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결혼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과 말씀을 당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야지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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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마음도 예쁜 배우자를 찾고 있는 형제들에게



20대 청년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연애와 결혼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를 찾는 잘못된 기준과 방법 때문에 만남과 결혼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많이 저지르는 잘못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는 얼굴도 마음도 예쁜 자매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형제들도 여자를 외모로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모와 마음 뿐 아니라 신앙까지 좋은 자매를 찾기에 고민은 많아지고 확률은 낮아집니다.

물론 외모도 마음도 전부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한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인이 인정하는 외모의 자매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받아온 관심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교만한 자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외모 때문에 교만해진 사람은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들의 영혼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풍조에 물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에 물든 만큼 영혼과 인격의 성장은 반비례합니다. 이런 여자는 화려한 색으로 벌들을 유혹하지만 꿀을 주지 못하는 꽃과 같습니다. 이런 여자들과 관계를 깊이 맺을수록 영혼의 깊은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일단 여자들의 외적 화려함에 정신이 팔린 형제들은 절대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형제들의 관점이 왜곡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아름다운 결혼을 가능케 하는 배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짝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형제들 가운데는 자매들을 사귈 때 '당신이 배우자라고 하나님이 알려주셨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형제들은 자매들과 헤어질 때도 '당신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우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하나님은 선하게 인도하시지만 한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 알려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들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신 짝을 찾으려는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확신과 욕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우자에 대한 확신은 결혼해 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특히 배우자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될 경우에 하나님께 그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또한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요구하시며, 그 선택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섭리가 존재합니다.

결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운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믿음의 자손들을 길러내는 것은 결혼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섭리는 문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갈등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됩니다. 문제가 없는 완벽한 배우자와 안전하고 행복한 결혼을 달라고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감정이 안정적이고 삐지지 않는 여자를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대부분의 여자는 감성이 지성보다 우월합니다. 여자들에게는 어떤 상황에 대한 정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자신이 잘 공감하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지성에 비해 감성은 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남자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여자들이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것에 대해서 남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쉽게 울거나 삐지는 여자들 앞에서 남자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입니다. 여자들의 참 마음은 그 요동하는 감정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수치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인지를 시험한 뒤에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참 마음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삐져도 남자가 그것을 용납한다면 여자의 참 마음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있는 어느 정도의 감정적 불안정성을 남자들이 인내하고 용납할 때 여자들과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특히 자매들은 결혼해서 온전한 용납을 경험하게 될 때 점차 감정적으로 안정되는데, 남편의 사랑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에 감정적으로 요동하지 않는 온전한 여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형제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 시각으로 자매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삶의 여정에서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도록 평소에 민감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의 불안정함을 따뜻함으로 받아들이고 품어 더 깊은 친밀감을 얻어낼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멋진 결혼은 좋은 여자를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여자보다 더 좋은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찾는 노력만큼이나 더욱 형제들이 믿음의 가장으로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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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경험케 하는 배우자



창세기 2장에는 최초의 결혼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창 2:18).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대로 여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 장면은 신약에서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 옆구리가 찢겨져 물과 피를 흘리신 신랑되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적인 그림입니다.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가 되는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바울은 남녀의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결혼 안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밝힙니다(엡 5:32). 결론적으로 인간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신비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모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연합과 사랑을 예수님이 보이신 방법대로 행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방법은 낮아짐과 섬김이었습니다. 흠이 많고 연약한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낮아지셨습니다. 그분과 동일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와 연합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온통 문제와 죄 투성이인 이 땅의 교회를 그의 신부로 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이렇게 사랑하심으로 그의 신부로 맞아들이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불완전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들이 온전한 신부로 준비되고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없고,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하기를 꿈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훌륭한 배우자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결혼이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좋고 잘난 사람을 만나야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배우자를 자기의 긍지와 자랑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혼한 뒤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을 했더라도 문제와 갈등은 항상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 자체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복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은 더 깊이 복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제 불능인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낮아지고 죽으신 것처럼 배우자를 복음의 방법으로 대할 때 상대방이 변하는 결과 뿐 아니라 자신도 복음에 깊이 잠기게 되어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깊이 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원리는 어찌 보면 여자에서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두 명령을 살펴보면 이것이 동일한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 같은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나타난 방식이며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또한 아내에게 주어진 복종의 명령 또한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낮아짐과 십자가의 원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나 아내나 동일하게 결혼을 통해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결혼의 중요한 목적이며 유익입니다.

모든 부부의 갈등은 십자가와는 반대되는 세상의 힘과 지배의 원리가 부부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려하고,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위해 배우자를 이용하려는 죄악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 안에 숨어 있는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하고, 죄성을 드러내는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작은 그리스도로 변해나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모습을 매일 일상에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경험케 하는 배우자는 어느 무엇보다 귀중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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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자매들에게
(뭐 이건 나랑은 상관 없지만.. 혹시나.. 이 글을 보시는 자매분들을 위해서.. )


모든 여자들은 때가 되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외로웠던 20대를 화려하게 마칠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신앙 있는 자매들의 제일 큰 고민은 교회 안에 '신실한' 형제들이 너무나 드물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결혼 적령기의 형제자매들 비율은 1대 10까지 이릅니다. 더구나 소수의 형제들 가운데서도 자매들이 기다리던 '신실한' 형제들은 더욱 희귀합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특별한 만남'을 준비해 주셨을 것이라고 믿는 자매들에게 있어서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상당한 스트레스와 고민을 야기합니다. 결혼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자매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이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결혼은 인간의 고안물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자매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길 기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남편이나 결혼이 아닌 하나님만이 만족의 근원이 되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와 어려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자아 중심적이며 상황 의존적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결혼 때문에 요동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황 의존성이 높은 자매일수록 그런 상황을 단번에 변화시켜줄 단 한 번의 기회를 추구합니다. 바로 그것이 '백마 탄 왕자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야곱의 부인인 레아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창 29:31-35까지 나오는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은 이야기는 여자의 깊은 영적 갈망은 결혼이나 남편이 아닌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열등한 외모 때문에 결혼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했던 레아는 아버지 라반의 '재치'로 야곱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레아는 그 당시 여자가 가장 큰 가치를 두었던 아들을 낳게 되면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낳는 아들마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라), 시므온(들음), 레위(연합)라는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나 네 째 아들을 낳고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의 유다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생산이 멈춥니다. 네 번째에야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을 그녀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남편이나 아들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이 그녀를 만족케 하실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자매들의 결혼에 대한 기대는 사실 환상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자상한 남편에 대한 기대, 현재의 가족과 환경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소망, 예쁘고 말 잘 듣는 아기에 대한 꿈과 같은 환상은 금방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이 클수록 그 절망도 커지기 마련인 것이 결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에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운 여자만이 남편만을 의존하지 않고 가족을 건강하게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 이런 상황을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좋은 사람만 만나면 되는 문제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한 영역이 바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개입이 없는 가정은 갈등과 문제의 온상이 되기 쉽습니다. 뼈 속까지 죄악으로 가득한 인생들이 만나 같이 살면서 어떻게 행복과 기쁨과 만족만이 가득하겠습니까? 평생을 다른 환경과 다른 생각으로 살던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떻게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사람은 많아도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부부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서 대충 맞추어 사는 것으로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그러한 수준으로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진정한 연합과 회복, 사랑과 희생, 공급과 풍요가 경험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런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이 필요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는 자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런 약속과 그것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이 있어야 결혼은 채워짐과 은혜가 가득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신실함'에 걸 맞는 '현숙함'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찬 자매들이 신실한 형제들을 배우자로 원합니다. 그런데 자매들이 신실한 형제들을 원하는 이유는 자신이 부족해도 영적으로 잘 이끌어주며 또한 하나님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형제가 이런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남자들은 결혼을 해서 자아가 깨어지는 과정을 지나가고 또한 아이를 낳아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느껴본 다음에야 신실한 형제라는 타이틀에 적합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매들은 신실한 형제에게 모든 영적 주도권과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얄팍한 계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가 스스로 현숙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현숙함의 핵심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의 유무입니다(잠 31:30). 실제로 결혼을 해서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얼마나 화장을 잘 하는가'나 '학교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감당해 보지 않았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 가운데 얼마나 지혜로운 반응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우발적인 상황과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세상적인 지혜와 경험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다양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 주시는 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이런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인생의 깨어짐과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영혼에 새기는 작업입니다. 결혼 때문에 외로움과 낮아짐의 시기에 처했을 때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이때 지혜를 체득한 자매는 결혼한 뒤에도 칭찬 듣는 현숙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매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영적 준비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의 문제는 개개인이 기본적인 부분에서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외로움, 주변의 압력, 결혼에 대한 환상, 부모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결혼을 도피처로 선택하는 것은 아주 미련한 일입니다. 결혼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스트레스는 자매들의 내면을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단,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만 말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크리스천 자매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영혼의 준비를 더욱 잘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영적 준비를 잘한 자매만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행복한 결혼과 가정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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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니 '자매용' 버전도 나에게 필요하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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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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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7 22:06

    정환이 너는 위에 조건들 다 만족하는 것 같다. 또 교회 다니는 여자들 중에 네가 신앙 좋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위에 거 다 만족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너는 교회 다니는 여자들 중에 아무나 하고 결혼해도 하나님 뜻에 어긋남이 없겠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기는 한다. 즉, 신앙 좋은 여자와 남자가 결혼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리실 것 같지는 않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1년 안에 결혼한다. ^^ 내 생각에, 결혼할 여자인지 아닌지는 처음 만났을 때 몇 일 안에 나타나는 수가 있고, 아니면 쭉 오래 알고 지냈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결혼할 사람이라고 불현듯 느낌이 오면, 결혼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오래 만나나 짧게 만나나 별 상관이 없더라고. 나 우리 집사람 처음 만나고 몇 주안에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었잖아. 근데 니가 다니는 교회에 신앙 좋은 여자 중에 니가 마음에 드는 여자 없으면, 친구한테 놀러가서 그 교회 방문해보면 좋다. 우리집에도 온나. 우리 교회 데리고 가 줄게. 시집 보내야 하는 부모님들 꽤 있다. 아 그리고 그래도 안되면, 안 믿는 여자 만나서 전도하면 된다. 이건 좀 리스키한데, 나는 되더라. 우리 집사람 요새 내보다 신앙이 갑절은 좋은 것 같다. 아 봄방학 대 보스턴 갈려다가 말았는데 갔으면 연락할려고 그랬거든. 그래서 들렀는데, 이상한 글이 있어서 답글 달고 간다. 잘 지내고.

    • 2010/03/18 02:45

      보스턴 오지 그랬어..
      요즘 보스턴 날씨 너무 좋아서 보스턴 아닌거 같은데 말이지..
      남녀가 만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 모두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자연스러움이 있는 것 같다..
      결혼할 사람일지 아닐지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달려 있을 듯..^^ ㅎㅎ Thanks for your advice..

  2. 2010/03/24 19:45

    목군 ㅎ 오랫만이지? 어여 좋은자매 만나서 알콩달콩 둘이 사는 모습 보여주시게나 기대하고 있을께~! ^^

    • 2010/03/25 02:00

      ㅎㅎ 누나 오랜만.. ㅎㅎ 누나 아직 LA에 있나?
      한국에 갔다는 얘기도 들었었는데..
      얼굴 본지도 진짜 오래된듯 싶네.. 쩝..
      한국이든 LA든 보스턴이든.. 함 봅시다..~~
      누나의 기대에 곧 부응할 터이니.. ㅋㅋㅋ

  3. 2010/04/23 19:53

    오...... 이 글 지금 쭉 훑어봤는데, 나중에 더 자세히 읽어바야겠어요. ㅎㅎㅎㅎㅎ

  4. 2010/04/25 08:34

    비밀댓글입니다

    • 2010/04/25 12:02

      ㅎㅎ 오랜만.. 어찌 지내나? ㅎㅎ
      정독 잘 하고.. ㅋㅋ
      글을 읽는다고 찾게 되는건 아니더라.. ㅋㅋㅋㅋ
      이번에 한국은 못갈듯.. ㅠ.ㅠ 으흑으흑..

  5. 2011/05/19 02:43

    필요했던 글이어서, 검색하다가 들르게 되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


며칠 전 김연아의 연기로 온 한국이, 아니 온 세계가 떠들석 거렸다.
수 많은 글을 김연아의 연기를 가지고 포스팅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부분만 말하고 싶다.


내가 피겨를 좋아하게 된 것은 2007-08시즌 부터였다.
당시 김연아는 이미 2007 세계 선수권 대회에 첫 시니어 무대 데뷔를 통해 '록산느의 탱고'로 쇼트부문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강한 인상을 주었을 때였다.
07-08년은 부상이 있었던 시기라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항상 1위 or 3위), 이미 '록산느의 탱고'를 봤던 나는 피겨의 매력에 빠져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김연아의 매력에 빠진 것이 아니냐 하면, 뭐 부인할 수 없겠지만, 최고의 스케이터인 김연아 덕분에 피겨를 더 친근하게 접했다고 해야할까나?

<록산느의 탱고, 71.95라는 당시 경이로운 쇼트 기록을 세웠었다. >


피겨는 스포츠이기 이전에 하나의 예술과 같다. 그래서 매력이 있다.
피겨에서 채점하는 요소만 뺀다면, 발레나 뮤지컬 같은 예술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때문에 선수들이 은퇴 후에 아이스쇼라는 장르에 종사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악셀을 뛴다고 해도, 미키 안도가 쿼드 점프를 주니어때 뛰었다 해도..
피겨는 스포츠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기술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Note: 마치 김연아=예술 vs. 아사다=기술 이런 공식으로 오해될 수도 있는데, 김연아의 점프는 빈틈이 없는 교과서 점프로 극찬받는다. 보통의 선수들이 편법을 사용하여 롱엣지를 남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석 점프를 구사한다. 반면, 아사다의 트리플 플립 등은 과거의 습관 때문에 완벽한 점프로 볼 수 없다.)

(NYT에서 김연아의 트리플 점프를 분석한 영상이 있다.
http://www.nytimes.com/interactive/sports/olympics/olympics-interactives.html#tab4
참고로, 정론지라 외치는 조선일보는 그 시간에 김연아의 몸매를 분석하고 있었다.(링크 안함))

<Yuna Spin, 김연아 밖에 할 수 없는 스핀 자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Yuna Spin으로 불리운다>


이번 올림픽때도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여자 선수들 중에서 김연아 만큼 곡에 녹아 들어간 선수가 없었다.
노래와 동작이 완전히 따로 노는 경우는 허다했고,
표정 연기가 아예 없거나 어색했던 경우가 훨씬 많았다.

천재 안무가 윌슨이 구성했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김연아의 경우 록산느의 탱고, 죽음의 무도, 세헤라자데, 007 Theme과 같은 곡들은 안무와 곡이 perfectly match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 표현을 해 주었기에 최고의 피겨 스케이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아사다 마오의 경우에 몇번의 실수가 있었는데도 2위를 한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트리플 악셀을 뛰었다고 2위를 주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트리플 악셀-더블 토룹 컴비네이션은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보다 기본 점수가 낮다!!) 아사다 마오도 곡의 완성도와 표현력이 좋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피겨는 점프를 뛰고, 잘 미끄러지고 한다고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표정이 나오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이런 표정/동작을 넣으라고 한 것 또한 대단한 것이다. >


이번 올림픽 경기를 보고서 피겨에 전혀 관심 없던 사람들도 김연아의 진가를 알았다며, 왜 다들 김연아 김연아 하는지 알겠다고 한다. 이번 Program은 정말 멋졌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소화해 주었기에 대단한 것이다.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서..

사람들이 김연아의 다음 스텝을 놓고서 왈가왈부 한다.
하지만 어짜피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멋진 연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다만 바라는 것은 김연아와 같이 감동을 주는 피겨를 하는 스케이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김연아 Kids라는 이름으로 수 많은 아이들이 피겨를 배운다고 한다.
물론 신체적, 체력적 훈련도 필요하겠지만, 그들에게 먼저 표현력과 음악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가르쳐주는게 어떨까?
오서와 윌슨이 말한대로 안에 잠재되어 있는 웃음과 표현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피겨를 더욱 예술로 승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방법인 것 같다.


< Ina Bauer라는 사람이 만든 동작이나.. 우리는 Yuna Bauer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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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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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3 00:32

    비밀댓글입니다


또 한번의 수련회를 다녀오다..
보스턴에 오고 나서 좀 그런 경향이 있지만.. 수련회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없어졌다.
(이건 왜 이럴까? 고민해 볼 문제이다..)

이번에도 가야하니까 가는 뭐 그런 마음으로 수련회에 등록했다. 그리고 다녀왔다..

수련회에서 무엇을 얻고 돌아왔는가..를 묻는다면.. 별로 없는 것 같다..
작년과 같이 기도가 너무나 잘 되었던 수련회가 아니어서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 저녁때 어쩜 이렇게 기도가 안되는지..
벽보고 기도하는 것 보다 더 답답했다..
그래서 빨리 기도회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데 왜 이리 안 끝내시는지.. ㅎㅎ

물론 채워야 할 기도의 내용은 결국 주일 오전 예배때 채우게 하셨다.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간다고나 할까..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신앙의 모습은.. '십자가'를 대할 때 그 구원의, 은혜의 감격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안신기 전도사님을 뵈면서 너무나 부럽고 멋져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 사명자로의 삶, 영혼을 향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실때..
주체하기 힘든 그 마음의 감격과 사랑이 넘치는 모습이다..

요즘 그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 알려주시는 중인 것 같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다가 터져 나오는 눈물이 감사했다.
내 영혼이 메마르지 않고,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1년만에 온 같은 장소로의 수련회인데.. 참 많은 것이 변했다..
그 당시에는 30명도 다 모르는 가운데 정말 조용히 있다가 갔는데..
지금은 30명만 모르고 나머지는 거의 다 알 정도로 공동체가 편해졌다..

김연아 경기를 보러 갔다는 이유로.. 이미지가 참.. 작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미지로 바뀌었고..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가.. 매우 조급해 하고 있는 이미지도 얻고 있고 ㅡ.ㅡ;
타이밍 하고는.. 참..


한가지 확실해진 것..
강사로 오신 양한갑 선교사님 간증을 들으며, 그리고 안신기 전도사님 가정을 보며..
다시 한번 배우자 기도에 대한 우선순위를 잡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강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나를 붙잡는 사람..
모든 사역에 있어서 나를 지탱시켜주는 사람..
가슴 뛰게 하는 내 반쪽의 모습이다.. 그래야 우리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 많은 사람중에 호감가는 사람이 없다면 독신의 은사가 있거나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완전 무서우신 사모님의 한마디가 왜 이리 무시무시하던지.. ㅋㅋ
이번 수련회는 나한테 무슨 결혼준비 수련회였던 것 같다..
기도는 안되는데 내내 들은 얘기가 그거 밖에 없어서 ㅡ.ㅡ+ (이 역시 인도하심이라 믿으며~ ㅎㅎ)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을 뛰게 한 한마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일을 맡기실 때에는.. 거룩한 삶을 가진 자를 부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삶이 내 삶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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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대학부 리더클럽 탈퇴를 권유하는 쪽지가 날라왔다.
하긴.. 탈퇴해야 하는 건데.. 사사로운 정 때문에 탈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대학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고..
그걸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에 탈퇴를 하고 있지 못했다.

가끔씩 이곳에서 어떤 자료가 필요할때 가서 다운도 받았고,
아이들이 적는 글에 댓글도 다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 리더 클럽에 있던 사진들을 다운 받았다.
2004년부터 약 100여 페이지가 넘는 사진들을 한장씩 보면서..
추억의 사진들을 하나씩 다운 받았다.

대학부 사진이 다 그렇지만.. 결국은 사람들 얼굴을 보는거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다시 돋아난다..
고마움. 반가움. 미안함. 어색함.. 복합적 감정들과 함께..

보아하니 사진도 참 많이 찍었고 많은 일들도 했다.
놀러도 많이 가고.. 수련회도 가고.. 파티도 많이 하고..

하나 둘씩 연락이 안 되어 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물리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가 멀어져가기 때문이겠지..
미국에 있어서 그 멀어져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이 조금 아쉽다...


이곳에서도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훗날 이 사진들을 보면서도 조금 전과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 얘긴.. 내가 지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일테니..



<엘더장할때 윤미엘더 집들이 갔을때 먹었던 진수성찬들.. 아 먹고 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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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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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4 20:47

    시장하셨군 그래.

  2. 2010/02/25 06:11

    한국오니...영~ 자장면 시켜먹을 의욕이 안생기는데
    미쿡에서는 왜 글케 집착했었는지....ㅋ
    뇩가면 효동각 가봐~ 거긴 한국보다도 자장면이 맛있는거같아 ㅎ

    • 2010/02/25 17:07

      거기 가봤어요..
      음.. 그때 진짜 맛있게 먹었다고 기억됨..

      그래도 한국에서 학교 뒷뜰에서 배달시켜 먹는 자장면 받과는 차원이 다름.. ㅋㅋㅋ

2010/02/14 22:33
인연.. 불교 용어기는 하지만 맘에 드는 용어이다..

어제 참 신기한 인연인 형을 한명 만났다.
같은 대전 출신으로.. 나는 대전외고를 다녔고, 그 형은 대덕고를 다녔다.
대전외고와 대덕고는 인접한 학교여서 기독써클 교류도 있고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서로 알았다.
내 고등학교 선배들도 그 형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남 교회를 다녔고 그 형은 대덕교회를 다녔다.

대학에 와서는 나는 연대 윗동네의 정외과/경제학과 였고.. 그 형은 아랫동네의 건축과였다.
내가 건축과에서 아는 유일한 두 사람을 그 형은 모두 알았다. ㅎㅎ
신기하게도 그 사람들 모두가 연대 건축과의 10% 정도 밖에 안된다는 '설계' 전공자였다.

제일 쇼킹했던건..
한미연합사 바로 옆 G3 건물에서 형이 카투사로 복무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CJG3 AVN 소속이어서 미8군 본사 건물 부속건물에서 근무했는데, 형은 본사에서 근무를 했던 것이다.
나랑 같이 근무했던 카투사가 그 형 직속 후임이기까지 했다는 ㅡ.ㅡ;

이때까진 항상 형이 나보다 1년 앞서서 먼저 가있었는데..
이번엔 내가 1년 먼저 보스턴에 왔다.. 거참 신기하기도 하지..

약 15여년의 시간동안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서로 알지 못하다가 접점이 생긴 인연..
이런 인연들은 아마 지금도 내 주위 어딘가에 많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만나게 하실 그 때를 준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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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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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3 03:00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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