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 감사란, 모든 환경 속에서 적합한 것. (Proper in every occasions)
 
     - 감사는 명령이다. 
     - 모든 상황 속에서 무조건 감사를 찾아라!!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반드시 보라..
     - 믿는 자들은 습관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 다음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 우리는 '현재'까지 일어난 일만 안다. 우리가 본 만큼 밖에 모른다. 
     - 모든 상황에서 감사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것. 


•  감사란, 내 삶에서 넘쳐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기도와 같이 간다. 
 
     -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다.  
     - 감사와 기도, 기쁨은 항상 같이 간다. 
     - 골 3:15~17 :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감사가 넘쳐난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을 알라. 
     - 골 4:2 : 기도 가운데 깨어있으라. 

     - 내 삶에 감사, 불평 중 어떤 것이 더 많이 들어가는가? 감사는 넘쳐나야만 한다. 
     -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 감사해야 한다. 

     -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한다. 그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봄'. 
     - 기도와 찬송, 감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적군을 치기 시작하심. 


• 감사란, 기쁨의 비밀이다. 

     - 골 3:15~16 : 감사는 기쁨으로 발전된다. 
     - 살전 3:9~13 : 감사가 없으면 기도가 없던지, 기쁨이 없다. 
     - 빌 4:4~6 : 기뻐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참 기쁨은 사람에게서 올 수 없다. 오직, 주님께로부터만 온다.

     - 상뢍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 무엇을 감사할지를 결정하고, 불평에서 감사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 감사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때 계속된다.
     - 감사를 선택하는 순간, 인생의 태도가 변한다.

     -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성품: 감사, 기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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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8월 2일) 하용조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작년 옥한흠 목사님에 이어서 또 한명의 영적 거장이 이 세상을 떠났다. 

하용조 목사님과의 첫 만남은 책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때 학교 앞에 있는 서점에서 집어들게 된 하목사님의 '사도행전 강해'..
입으로 늘 말씀하셨듯이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시던 그 분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었다.

'선교하는 교회', 'Act 29'.. 
온누리교회의 구석구석에 보이는 그분의 열정은.. 
그저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만들어진 교회가 아니라,
그분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대로 사역할 수 있었던 교회임을 보여준다.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항상 '저기에 내가 가야하는데..'라고 아쉬워 하시던 모습은 방관하고 있는 '보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보내는 선교사'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꿈이고, 하나님의 소망이기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회의적이거나 무리라 할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셨기에 가능했다. 
참으로 영적 거장이다.. 



옥한흠 목사님과의 만남은 잊을 수가 없다.
처음 교회를 내 손으로 정해야 했던 순간.. 사랑의교회 예배를 처음으로 드리던 때가 기억난다.
예배를 시작하며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 두 손을 들고 아이처럼 찬양하시던 옥 목사님의 모습..
그 모습에 감동받고 교회를 정하게 되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매 설교시간마다 보여주셨다.
멋있게 말하려는 미사여구도,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예화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외치시는 설교에는 힘이 있었다. 



특히, CAL 세미나의 첫번째 강의를 언제나 장식하는 '광인론' 강의는 잊을 수가 없다.
예수에 미치고, 제자훈련에 미치고, 교회에 미치고, 성도에 미친.. 
수동적이기만 한 평신도들을 깨우고, 평신도들과 함께 사역하는 교회..
지금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얘기지만, 모두가 선뜻 나서서 하기 힘들어 했던 그 때에..
성도들 한명 한명을 붙잡고 제자훈련으로 주님의 제자되어 살도록 하신 열정.. 

생의 마지막에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 서기 부끄럽다고 하시던 모습..
이 땅에서 너무 과분한 칭찬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 칭찬 안 해주실 것 같다며 걱정하셨다는 일화는..
이분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자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참으로 영적 거장이다. 


이렇게 점점 한국의 복음주의 1세대 목회자들의 역할이 점점 끝을 맺는 것 같다. 
그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배웠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아직도 그 교회에서, 그리고 그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려면.. 
그렇게 배운 내가 그 열정을 이어 받아야 한다. 

그토록 예수를 닮고 싶어했던 모습.. 
그토록 복음 들고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모습..
그토록 한명 한명 제자로 세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했던 모습.. 
남들이 모두 '아니라'고 할 때,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모습..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 
그 수 많던 육체의 가시.. 이제 모두 내려놓고.. 그토록 사랑하시던 주님 품에서 빙그레 웃음 지으시길.. 
목사님들의 열정은 이제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보여주신 수 많은 모습들.. 간직하겠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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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creditor shall cancel any loan they have made to a fellow Israelite.” (15:2)

This chapter is very interesting to me in the sense of economics. This rule is very hard to be accepted in modern economics. (I don’t know how well it was accepted in ancient times).

In the view of an economist, this rule is uncomfortable in two ways:

1. Moral Hazard : Knowing he will be released in the seventh year, the borrower will not pay back the money for other six years. 

2. No loan at all : Knowing the Moral Hazard problem, the lender will not lend any amount of loan to anyone, because he knows he cannot be paid back.

We make all concerns toward borrowers that they will not pay back. So, it’s very reasonable to warn borrowers to repay in time. However, God warns lenders rather. He tells them not to be hardhearted or tightfisted toward borrowers, and also “commands” them to be openhanded. 

This is the God’s way, very different from the worldly way. He cares the poor and the weak more, because they know they cannot live without God. The rich and the strong rely more on what they have now rather than on God. Thus, God commands them to put down what are in their hands.

Don’t forget! The Word clearly says that there should be no poor among us if we fully obey God and follow all the commands of God. The poverty in the world is the result of “our” sins, not that of the poor. So, no one can blame the poor for their con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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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5 10:08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라는 책을 추천해. 신부님이 썩 그리 학자스럽게 쓴 책은 아니고 경제학 학사의 머리로는 이게 현재도 실현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볼 주젠거 같아. 사회정의 구현의 일부로서.

    • 2011/05/17 17:01

      그 책 읽어봤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지..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현 system에 얼마나 내 사고가 묶여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며 내 삶의 영역에 실천하는거.. 어려운거 같아..
      그만큼 내 삶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내려놓아야 하니..
      Anyway.. Thanks!


요즘 QT 본문이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신명기여서인지 아침 묵상이 신난다.
나와 너무 비슷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여서인지 더 공감도 되고 내 자신을 비춰볼 여지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신명기 1장 19절~46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때 나타나는 우리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보아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낸 뒤에 정탐꾼이 "It is a good land that the Lord our God is giving us."(신1:25)라고 본 것을 말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약속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믿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명령하신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다'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내 생각'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에 더 믿음이 간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약속의 증거를 '보아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불순종의 열매는 '불평'과 '원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당연히 따라오는게 '불평'과 '원망'이다. 거꾸로 말해서 내 삶에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죄를 지은 아담의 첫번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러기 때문에 또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왜곡'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멸하시려고" (신 1:27)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순간 우리는 '불평', '불만',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왜냐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 되심을 신뢰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반응은 짜증섞인 투정일 뿐이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는 순간.. 지금까지 고백해온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이전의 고백과 모든 감사의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고, 뭔가 안 풀렸던 일들, 안 좋았던 일들만 생각나게 된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상기시킨다.

4. 참된 회개를 못한다.

모세의 질책과 하나님의 노하심을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회개한다. (신 1:41)
이는 참된 마음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닌 '두려움'에 잠시 굴복하는 회개일 뿐이다.

이는 회개 이후에 나타난 그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겠다는 행동이 아닌, 다시 '내 생각에 옳은' 행동을 하게 된다.
40년 동안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그게 싫으니까) 어떻게든 지난 죄악을 만회하고자 고집을 피우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이 절대로 못하겠다던 일을 한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다. 내 느낌에 '좋다' '싫다'에 따라 행동하는게 우리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옳은것'을 하기를 원하시고 '틀린것'을 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좋아함'과 '싫어함'에 상관 없이.. 


신명기 QT를 하면서.. 모세의 '설교'이기 때문에..
그냥 Audio Bible을 틀어놓고 듣는 것 만으로도 은혜가 된다.
나에게 바로 말해주는 것 같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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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수련회를 앞두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누구를 위해 공부하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 되었다..

왜 경제학을 공부하게 하셨을까? 누구를 위해 공부하라고 하시나?


"나의 사명은 이방의 빛으로서 모든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꽂아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임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권위 있는 경제학자가 되어 저개발 국가의 경제 개발을 돕고, 특히 북한의 경제 회복과 남북의 사회 경제적 통합을 위한 정책을 만들 것이다."

이 사명선언서에 맞게 공부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뿐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시선은 90%의 세상이 아닌 10%의 세상을 보게 한다.

마음 한켠에 90%의 세상에 진 빚은 잔뜩 있는데, 주변의 환경과 현실 등을 핑계로 10%의 세상에 신경을 쏟게 만든다. 

마치 모든 경제가 10%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처럼... 


'사랑의 경제'를 그려보고 싶다. 90%의 Nobody들을 Somebody로 대우하는.. 그런.. 

결국.. How?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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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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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적는 송구영신 Note.. 

올해는 "2010년을 되돌아 보며 2011년의 큰 틀 세우기"이다.. 


10년도 넘게 지우지 않고 남아있던 기도제목 중 한 개가 지워졌다. '배우자 위한 기도'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으니 감사의 제목란으로 옮겨졌다.  


그 밑에 보이는 '나 먼저 준비된 배우자 되기'

나는 위의 기도를 하며 얼마나 준비된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까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내가 누군가의 남편으로, 한 가정의 영적 가장으로 서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른 것이 보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가 '해야' 하는 분량이 다 차기도 전에 기도제목을 '먼저' 응답해 주셨다.


이렇게 또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 

내 삶의 모든 부분은.. 내가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다'.. 


그래서 여러모로 하나님께 죄송하고 부끄러운 2010년이지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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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김일승 목사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요즘 목사님이 내 마음을 읽고 계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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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악으로 하나님의 생명력이 단절된 인간에게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욕망은 영혼의 공허감과 불만족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입니다. 욕망 때문에 인간은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욕망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반역과 저항으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욕망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싶어 하고, 자기 뜻대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표출됩니다. 욕망 때문에 경쟁과 다툼이 생기고 인간관계는 깨어집니다.

  욕망은 반드시 분노를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욕망을 이루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욕망을 부리다가 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분노가 내면에 축적됩니다. 나이가 들면 더 강하고 높은 사람들 아래에서 억압을 당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노가 쌓입니다. 욕망이 큰 만큼 분노도 더 많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나쁜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는 욕망과 분노가 동시에 큰 부모입니다. 욕망이 크다는 것은 자녀에 대한 기대와 자기 뜻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크다는 것은 자녀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폭력을 자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억압과 폭력을 반복적으로 받은 자녀는 마음에 억압된 분노를 차츰 쌓아가게 됩니다. 많은 경우 춘기 때 이런 억압된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욕망과 분노가 너무 큰 부모 밑에서 완전히 마음이 파괴된 아이들은 이 시기에도 제대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마그마와 같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쌓여진 분노는 결혼과 자녀 양육의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자녀 양육의 과정에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욕망에 영혼이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끝이 없는 요구 앞에서 부모의 욕망에 의해 눌렸던 내면이 자극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자기가 받았던 것보다 더 심한 극단적인 분노와 폭력을 자기 자녀에게 행사하게 됩니다. 자기도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한 채로 아이의 요구와 욕심에 갑작스럽게 폭발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규율을 정해놓고 그것을 어기면 무섭게 체벌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화를 내고 때린 후에 후회하고 눈물도 흘려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의 중심에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욕망을 통해 눌릴 대로 눌린 무서운 분노의 응어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분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낸 욕망과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대를 이어 계속 전이됩니다. 이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죄악을 용서하고 자신의 분노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은 드러나게 화를 내고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화를 내는 것도 자녀가 말을 듣지 않고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좌절된 욕망이 만들어낸 죄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악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 대신 세우시고 죽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믿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회개하며 자신의 내면에 쌓여진 분노가 얼마나 무섭고 악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능력이 내면의 분노를 서서히 녹이고 파괴하게 되면 결국 이 죄악의 근원이 파괴되어 무서운 욕망과 분노의 사슬에서 놓임 받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악을 끊으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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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posting 하는 글인데 퍼온 글이라 조금은 부끄럽다.
하지만 요즘 고민하며 기도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인데다가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줬기에 퍼온다.

김일승 목사님 홈페이지 묵상의 숲(kissdei.cyworld.com)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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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기독교의 모습은 두 가지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성공주의는 영웅주의나 물질주의적인 모습으로 표출되며 세상적인 힘과 풍요를 추구하는 세속주의가 종교화된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영성을 병 치료, 은사, 기적과 같은 가시적 현상만으로 축소시킨 것으로 기복주의를 그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성공주의와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들의 죄성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며 현대의 시대 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지금과 같이 성공주의나 신비주의가 유행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현대가 물질문명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질문명의 사생아처럼 등장한 물질주의는 사람들의 가치를 전부 현세에서의 성공과 풍요로 축소시키고 말았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진리요 규범이라고 여기던 것들을 파괴하면서 가시화되지 않은 영적 세계와 신비한 세계에 대한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성에 대한 추구는 감성적 체험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진정한 영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가 본질을 상실하고 힘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영향을 받아 뒤틀리고 기형적인 모습의 성공주의와 신비주의만을 추구하는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그 공허감과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힘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주의적 기독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에서도 힘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며 큰 힘을 소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기도만 하면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과 말의 선포로 놀라운 세상적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복주의를 배경으로 한 신비주의는 기적을 통해 단번에 문제가 해결됨으로 이익도 얻고 믿음도 자라기를 추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병을 치료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임으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언을 받아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알면 신앙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해 금이빨을 만들어 주시거나 금가루 등을 뿌려주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많이 기도하면 천사나 귀신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영적 권세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모든 직분이 말세에는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은 사도라는 직분을 다시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죽어버린 흙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며 자아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 성장한 자아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 자아가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해 옛 자아가 원하는 세상의 힘과 풍요에 대한 갈망과 의존을 전부 잘라 버리십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만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숙해질수록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가시적 증거보다는 믿음으로만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아의 깨어짐은 더 깊어지고 눈에 보이는 증거대신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야 정상입니다.


세상적 가르침들은 죄악에 대한 회개와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매혹적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풍요롭고 힘 있게 살고 천국에서도 지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적 풍요와 세상적 힘을 통해서는 절대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과 세상적 힘에 대한 의존이 잘려나가고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될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고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말씀과 은혜로만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성공주의와 신비주의적인 기독교는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점점 희석되어 가는 이 시대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새엔가 '다른 복음'을 믿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거짓된 복음이 난무한 이 시대에 참된 복음이 교회마다 선포되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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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기 그지 없지만 파멸로 이끈다.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삶은 힘들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삶은 더 없이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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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소명, 사명, 비전" 이런 단어들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뜻도 왠지 비슷해 보이고 해서, 교회에서 거의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어딘가에 정확한 definition도 없기 때문에, 목회자 분들끼리도 서로 각자의 정의에 따라 사용하신다.

  고등부, 대학부, 그리고 사랑리더십아카데미를 통해서 얻은 교훈 등을 가지고 나름 스스로 이 세가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냥 내 마음대로 내린 것은 아니고, 말씀을 바탕으로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내 스스로 나의 사명은 무엇이고 비전은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개념이 생기고, 각각에 맞추어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는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I. 소명(Calling)

  오스 기니스는 그의 저서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소명을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


  조금 추상적이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과 '그분을 섬긴다'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말씀으로 본다면 이 두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인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53: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53:21)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소명을 가지고 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모두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에 모두 십자가 아래에서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동일한 부르심'이지만 이 부르심은 '위대한 부르심'이기에 그 누구도 흔들수 없는 '강력한 부르심'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3~34)

  오스 기니스는 기독교가 소명을 '직업'으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했다. 즉, 우리는 종종 "나는 ~가 되는 것으로 부름 받았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부르심' 보다는 '무엇으로'에 더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일차적인 소명은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이차적인 소명은, 삶의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하는 것이다. 이는 '직업' 그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 답게 행동하는 가가 더 중요함을 말해준다.

  정리하자면 소명은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르심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에 맞게 반응하면 되는 것이다. 


II. 비전 (Vision)

  이 비전이라는 단어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며 너무나 많이 남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전=직업=꿈'과 같은 단순한 관계로 인식되어 "넌 뭐가 되고 싶니?"의 교회 version이 "너의 비전은 무엇이니?"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비전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우리가 보는 무언가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무언가이다.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이다. 마치 우리가 퍼즐을 맞출 때 완성된 그림을 상상하며 맞추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비전이다.

  궁극적인 비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에서의 예배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한때 한국에서 열풍을 불었던 '비전'이라는 찬송이 그래서 이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에서의 예배이자 모든 믿는자들이 부르심에 가장 합당한 삶을 사는 모습인 것이다.

  이 요한계시록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우리 삶의 자리에 이뤄질 것을 꿈꾸는 것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비전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단순하다.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꿈꾸는 것, 북한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는 것 등등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이 있다. 현실의 모습을 봤을 때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완전하게 회복된 모습을 그리게 하시는 것이 바로 비전이다.

  결국 이 비전을 꿈꾸며 살기에 우리의 삶에는 '목적'이 생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개인 각자에게 맡겨진 일의 분량이 있다. 그것이 바로 비전과 사명을 연결시켜주는 링크이다.


III. 사명(Mission)

  사명은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소명이 없는 자들에게는 사명이란 있을 수 없다. 사명의 기본 바탕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움을 받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사랑의교회 공동체 고백 中)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때, 그 누구도 아무 이유 없이, 목적 없이 보냄을 받지는 않는다. 모두가 보냄을 받을때 그가 일생동안 해야할 일에 대해 적힌 사명장을 받고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명은 우리의 '직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직업 그 자체가 사명은 아니다. 단지 직업은 사명을 이루는 도구가 될 뿐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 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사명이라면 음악가, 작가등의 직업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또는 직업과 사명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자신의 직업과 관계 없이 주일학교에서의 봉사를 통해서 그 사명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사명'은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다시 세상으로 보내실 때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명장을 펴 보면 우리가 왜, 무슨 이유로 이 땅에서 사는지를 알 수 있다. 사명장을 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의 초반부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자신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발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발견하는냐가 아니라 '발견했는가'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여 사명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 전체이다.

  흔히 자신의 사명과 비전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 스케일이 큰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간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그런 거창한 사명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간증을 듣고 나면 그 순간에는 큰 도전을 받지만, 자신의 현실과 비교해 봤을 때 느껴지는 큰 괴리감으로 인해 다시 무기력함에 빠지곤 한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성공스토리를 듣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명의 위대함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얼마나 그 사명을 좇아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IV. 소명, 비전, 그리고 사명

  그렇다면 이 세가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가장 먼저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세가지 모두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보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꿈꾸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억지로 사명을 만들어내고 비전을 지어내는 노력을 해야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소명 또한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꾼다. 우리가 다 그릴 수도 없는 그 위대한 꿈 가운데 일부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우리는 그 비전을 품고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산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소명, 비전, 그리고 사명을 묵상해보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의 소명을 받았다.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7:15)
  그리고 바울은 모든 서신서에서 각 교회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바울은 순교의 길을 떠나며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이처럼 바울은 부르심에 순종했고, 비전을 붙잡았으며, 사명따라 산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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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4 09:54

    비밀댓글입니다

    • 2010/04/24 13:54

      난 내가 글 잘쓰는거 같지도 않은데..
      말씀도 잘 못 읽고 있고..
      하나님과의 대화는 더더욱이나 요즘 꽝인데..
      흠..

  2. 2010/09/20 15:49

    참 좋은 글 이네여


보스턴의 날씨 만큼이나 변화 무쌍했던 10여일이 지났다..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이 일어났고..
처절하다시피 힘들어하며 나의 밑바닥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총 6주 정도의 시간..
마치 신병 훈련소에 갔다 온 것과 같이.. 폭풍처럼 내 삶을 뒤흔들고 지나가 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기가 막혀서 하나님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나 할까..
그냥.. 할 수 있었던 말은.. "Why?" 한 단어였다..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마냥 잘 될꺼야.. 괜찮아질꺼야..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게 무엇을까.. 분명히 있을텐데..
나를 이끌어가시는 방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늘 예배시간.. 마지막 축도때 말씀을 보며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5:13)


미국으로 떠나올 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제자훈련'..
수련회 때 기도 받았던 '내 앞에 놓인 많은 test 관문들'..

지난 2년여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 Test를 시키셨다. "너는 나를 믿니?"라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힘들때마다 나는 "네"라고 대답하는 훈련을 받았고.. 그것을 이제는 진심으로 고백하게 된 것 같다.

이번 어려움 속에서 나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더 강하게 믿게 되었다.


다음 Test는 무엇일까.. '소망'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행하실 일들을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것..
느헤미야가 자신의 비전을 향해 달려갔던 것 처럼,
바울이 뒤에있는 것은 잊고 오직 한일 앞에 있는 것만 보며 달려간다고 했던 것처럼..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도로에서 사고를 안 낼수 없듯이..
'믿음'에 대한 test를 어느정도 통과했다고 해서 내 삶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항상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골목길에서 운전 연습을 하는 것에서 떠나..
면허시험을 통과함으로 highway를 달릴 수 있는 소망함을 가졌다고나 할까....


얼만큼까지 꿈을 꿀 수 있을까..
김하중 대사님처럼.. 정진호 교수님처럼..
얼마나 소망하며 살 수 있을까.. 얼마나 기대하며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기에'.. 이젠 소망할 수 있다..
아마도 이제 크게 그려보라고 백지와 펜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신 것 같다..


사명선언서에 적었었듯이..
가정에 대한.. 공부에 대한.. 열방을 향한..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더 크게.. 더 원대하게..

아마.. 지금 내가 소망하는 그 만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 같다..
최대한 크게.. 최대한 공의롭게.. 최대한 아름답게..
꿈꾸자..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자..


기대감이 한 순간에 무너짐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어했던 나를 보며..
이번 Test가 소망에 관한 것임을 알게된 것은.. 참.. 아이러니 하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God is good all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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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안에 결혼하겠다고 선포를 해 놓은지라.. 그 선포가 믿음에 바탕을 둔 선포라면, 뭔가 올해 일어나겠기에..
정신차리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쩍... 그래서 간만에 김일승 목사님 말씀을 다 뒤져 읽어봄..
근데 정말 길다.. @.@


다음은 김일승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kissdei.cyworld.com)
(밑줄 그어진 부분은 제가 임의로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표시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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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결혼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선택입니다. 한 번 선택한 뒤에는 무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것이 결혼입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집니다. 또한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기 때문에 실패가 없는 선택을 위해 여러 상황들과 사람들을 비교하며 고민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교와 고민을 많이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대부분의 결과는 비슷합니다.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하면 더 행복하고, 쉽게 결정하면 불행해지는 공식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 결혼입니다. 자신과 꼭 맞는 사람과 결혼하면 갈등이 없고,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갈등이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배우자를 선택하기 전에 세속적인 가치들과 영적 가치들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성경적 가치관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정 안에서는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는 결혼사진을 찍을 때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아름다운 외모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결혼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연예인들의 결혼이 수없는 외도와 이혼으로 얼룩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행복하게 만들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돈, 외모, 학력, 집안의 배경 등이 아닙니다. 결혼은 희생, 인내, 섬김, 복종, 겸손, 온유를 통해만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기본적인 외적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내적 조건들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외적 조건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내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그래서 배우자의 선택이 더욱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 가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세상적인 조건이 대충 맞으면 쉽게 결혼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은 세상적 가치뿐 아니라 영적 가치와 신앙까지도 갖춘 사람을 찾기 때문에 결정이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세상적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에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추인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게 됩니다.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소망한다면 영적 가치를 위해 세상적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이 먼저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갈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구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많은 조건들을 따지는 이유는 갈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사람을 찾는 사람은 성격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있을 갈등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과 성격이 다른 사람을 찾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약점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비슷한 실패를 반복하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결혼의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고려하는 대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수고는 결혼한 뒤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 활달한 성격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는 답답하다면서 집 밖으로만 배회하는 배우자 때문에 고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격이 차분하고 안정적이라서 결혼했는데 이 사람이 가까운 사람에게만 쌓아둔 분노를 폭발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똑똑하고 정확해서 결혼했는데 배우자에게도 정확성과 획일성을 요구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고민한 뒤에 결정해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결혼은 갈등과 실패가 없는 행복과 기쁨만이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결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의 가장 큰 축복과 선물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친밀감입니다. 하지만 결혼의 깊은 친밀감은 자아를 결혼이라는 제단에 바치는 희생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자신의 자아를 타자를 위해 포기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하나님 과의 관계의 친밀감도 얼마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죄성으로 똘똘 뭉친 두 사람이 만나 깊은 친밀감을 얻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갈등과 깨어짐과 용서와 회복의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지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얼마나 반복적으로 경험하는가가 친밀감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부부는 깨어지지 않은 자아를 가지고 서로 타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는 결혼이 가져오는 친밀감의 깊이와 만족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결혼은 깨어진 자아가 서로 연합되는 과정에서 타인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된 존재의 기쁨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갈등과 실패만이 결혼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관계의 갈등과 실패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야기합니다. 또한 인간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죄성의 깊이 또한 더 깊어집니다. 친밀감의 욕구와 사랑은 잠시 자신의 내면을 감춘 무장을 해제하게 만들지만 이것은 더 깊이 상처받을 수 있고, 고통을 받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갈등이 어느 다른 갈등보다 깊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한 몸이 되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이 원수보다 더 심한 관계로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겠다고 결혼한 사람을 향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의 유일한 소망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완전히 깨어지고 무너져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운다면 실패는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원과 지혜가 의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적 성취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결혼이 그렇습니다. 깊은 친밀감을 원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자아의 깊은 죄성이 드러나고 충돌하는 곳에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매어달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부부의 갈등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깨닫는 영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로나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를 얻길 구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일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중요한 문제에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이미 그것을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뜻이 강하게 서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자아의 욕구와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을 따르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라고 사인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문제만을 두고 아무리 금식하고, 새벽 기도를 해도 근본적인 영적 변화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결혼이나 진로의 문제에서만 하나님께 뜻을 간구하고 매어달리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자아의 포기가 없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화신이 우상입니다. 좋은 결혼을 위한 인도하심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욕망의 대상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 순간에만 간구한다면 이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닌 스스로의 뜻과 생각으로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뜻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중요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문제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인간 자아의 깨어짐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두 남녀의 결혼을 축복하길 원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이 아담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도와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라고 순간적으로 고백했던 말을 이제는 넘치는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는 단번에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세속적 가치의 포기, 갈등과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자아의 깨어짐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가 선행되어야만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결혼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과 말씀을 당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야지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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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마음도 예쁜 배우자를 찾고 있는 형제들에게



20대 청년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연애와 결혼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를 찾는 잘못된 기준과 방법 때문에 만남과 결혼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많이 저지르는 잘못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는 얼굴도 마음도 예쁜 자매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형제들도 여자를 외모로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모와 마음 뿐 아니라 신앙까지 좋은 자매를 찾기에 고민은 많아지고 확률은 낮아집니다.

물론 외모도 마음도 전부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한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인이 인정하는 외모의 자매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받아온 관심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교만한 자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외모 때문에 교만해진 사람은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들의 영혼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풍조에 물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에 물든 만큼 영혼과 인격의 성장은 반비례합니다. 이런 여자는 화려한 색으로 벌들을 유혹하지만 꿀을 주지 못하는 꽃과 같습니다. 이런 여자들과 관계를 깊이 맺을수록 영혼의 깊은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일단 여자들의 외적 화려함에 정신이 팔린 형제들은 절대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형제들의 관점이 왜곡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아름다운 결혼을 가능케 하는 배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짝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형제들 가운데는 자매들을 사귈 때 '당신이 배우자라고 하나님이 알려주셨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형제들은 자매들과 헤어질 때도 '당신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우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하나님은 선하게 인도하시지만 한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 알려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들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신 짝을 찾으려는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확신과 욕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우자에 대한 확신은 결혼해 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특히 배우자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될 경우에 하나님께 그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또한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요구하시며, 그 선택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섭리가 존재합니다.

결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운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믿음의 자손들을 길러내는 것은 결혼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섭리는 문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갈등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됩니다. 문제가 없는 완벽한 배우자와 안전하고 행복한 결혼을 달라고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감정이 안정적이고 삐지지 않는 여자를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대부분의 여자는 감성이 지성보다 우월합니다. 여자들에게는 어떤 상황에 대한 정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자신이 잘 공감하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지성에 비해 감성은 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남자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여자들이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것에 대해서 남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쉽게 울거나 삐지는 여자들 앞에서 남자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입니다. 여자들의 참 마음은 그 요동하는 감정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수치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인지를 시험한 뒤에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참 마음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삐져도 남자가 그것을 용납한다면 여자의 참 마음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있는 어느 정도의 감정적 불안정성을 남자들이 인내하고 용납할 때 여자들과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특히 자매들은 결혼해서 온전한 용납을 경험하게 될 때 점차 감정적으로 안정되는데, 남편의 사랑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에 감정적으로 요동하지 않는 온전한 여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형제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 시각으로 자매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삶의 여정에서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도록 평소에 민감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의 불안정함을 따뜻함으로 받아들이고 품어 더 깊은 친밀감을 얻어낼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멋진 결혼은 좋은 여자를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여자보다 더 좋은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찾는 노력만큼이나 더욱 형제들이 믿음의 가장으로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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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경험케 하는 배우자



창세기 2장에는 최초의 결혼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창 2:18).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대로 여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 장면은 신약에서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 옆구리가 찢겨져 물과 피를 흘리신 신랑되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적인 그림입니다.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가 되는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바울은 남녀의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결혼 안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밝힙니다(엡 5:32). 결론적으로 인간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신비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모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연합과 사랑을 예수님이 보이신 방법대로 행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방법은 낮아짐과 섬김이었습니다. 흠이 많고 연약한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낮아지셨습니다. 그분과 동일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와 연합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온통 문제와 죄 투성이인 이 땅의 교회를 그의 신부로 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이렇게 사랑하심으로 그의 신부로 맞아들이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불완전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들이 온전한 신부로 준비되고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없고,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하기를 꿈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훌륭한 배우자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결혼이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좋고 잘난 사람을 만나야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배우자를 자기의 긍지와 자랑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혼한 뒤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을 했더라도 문제와 갈등은 항상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 자체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복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은 더 깊이 복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제 불능인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낮아지고 죽으신 것처럼 배우자를 복음의 방법으로 대할 때 상대방이 변하는 결과 뿐 아니라 자신도 복음에 깊이 잠기게 되어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깊이 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원리는 어찌 보면 여자에서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두 명령을 살펴보면 이것이 동일한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 같은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나타난 방식이며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또한 아내에게 주어진 복종의 명령 또한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낮아짐과 십자가의 원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나 아내나 동일하게 결혼을 통해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결혼의 중요한 목적이며 유익입니다.

모든 부부의 갈등은 십자가와는 반대되는 세상의 힘과 지배의 원리가 부부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높아지려 하고, 지배하려하고,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위해 배우자를 이용하려는 죄악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 안에 숨어 있는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하고, 죄성을 드러내는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작은 그리스도로 변해나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모습을 매일 일상에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경험케 하는 배우자는 어느 무엇보다 귀중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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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자매들에게
(뭐 이건 나랑은 상관 없지만.. 혹시나.. 이 글을 보시는 자매분들을 위해서.. )


모든 여자들은 때가 되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외로웠던 20대를 화려하게 마칠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신앙 있는 자매들의 제일 큰 고민은 교회 안에 '신실한' 형제들이 너무나 드물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결혼 적령기의 형제자매들 비율은 1대 10까지 이릅니다. 더구나 소수의 형제들 가운데서도 자매들이 기다리던 '신실한' 형제들은 더욱 희귀합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특별한 만남'을 준비해 주셨을 것이라고 믿는 자매들에게 있어서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상당한 스트레스와 고민을 야기합니다. 결혼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자매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이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결혼은 인간의 고안물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자매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길 기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남편이나 결혼이 아닌 하나님만이 만족의 근원이 되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와 어려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자아 중심적이며 상황 의존적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결혼 때문에 요동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황 의존성이 높은 자매일수록 그런 상황을 단번에 변화시켜줄 단 한 번의 기회를 추구합니다. 바로 그것이 '백마 탄 왕자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야곱의 부인인 레아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창 29:31-35까지 나오는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은 이야기는 여자의 깊은 영적 갈망은 결혼이나 남편이 아닌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열등한 외모 때문에 결혼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했던 레아는 아버지 라반의 '재치'로 야곱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레아는 그 당시 여자가 가장 큰 가치를 두었던 아들을 낳게 되면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낳는 아들마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라), 시므온(들음), 레위(연합)라는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나 네 째 아들을 낳고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의 유다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생산이 멈춥니다. 네 번째에야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을 그녀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남편이나 아들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이 그녀를 만족케 하실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자매들의 결혼에 대한 기대는 사실 환상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자상한 남편에 대한 기대, 현재의 가족과 환경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소망, 예쁘고 말 잘 듣는 아기에 대한 꿈과 같은 환상은 금방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이 클수록 그 절망도 커지기 마련인 것이 결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전에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운 여자만이 남편만을 의존하지 않고 가족을 건강하게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 이런 상황을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좋은 사람만 만나면 되는 문제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한 영역이 바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개입이 없는 가정은 갈등과 문제의 온상이 되기 쉽습니다. 뼈 속까지 죄악으로 가득한 인생들이 만나 같이 살면서 어떻게 행복과 기쁨과 만족만이 가득하겠습니까? 평생을 다른 환경과 다른 생각으로 살던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떻게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사람은 많아도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부부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서 대충 맞추어 사는 것으로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그러한 수준으로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진정한 연합과 회복, 사랑과 희생, 공급과 풍요가 경험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런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이 필요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는 자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런 약속과 그것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이 있어야 결혼은 채워짐과 은혜가 가득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신실함'에 걸 맞는 '현숙함'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찬 자매들이 신실한 형제들을 배우자로 원합니다. 그런데 자매들이 신실한 형제들을 원하는 이유는 자신이 부족해도 영적으로 잘 이끌어주며 또한 하나님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형제가 이런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남자들은 결혼을 해서 자아가 깨어지는 과정을 지나가고 또한 아이를 낳아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느껴본 다음에야 신실한 형제라는 타이틀에 적합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매들은 신실한 형제에게 모든 영적 주도권과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얄팍한 계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가 스스로 현숙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현숙함의 핵심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의 유무입니다(잠 31:30). 실제로 결혼을 해서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얼마나 화장을 잘 하는가'나 '학교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감당해 보지 않았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 가운데 얼마나 지혜로운 반응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우발적인 상황과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세상적인 지혜와 경험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다양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 주시는 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이런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인생의 깨어짐과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영혼에 새기는 작업입니다. 결혼 때문에 외로움과 낮아짐의 시기에 처했을 때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이때 지혜를 체득한 자매는 결혼한 뒤에도 칭찬 듣는 현숙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매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영적 준비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의 문제는 개개인이 기본적인 부분에서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외로움, 주변의 압력, 결혼에 대한 환상, 부모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결혼을 도피처로 선택하는 것은 아주 미련한 일입니다. 결혼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스트레스는 자매들의 내면을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단,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만 말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크리스천 자매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영혼의 준비를 더욱 잘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영적 준비를 잘한 자매만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행복한 결혼과 가정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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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니 '자매용' 버전도 나에게 필요하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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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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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7 22:06

    정환이 너는 위에 조건들 다 만족하는 것 같다. 또 교회 다니는 여자들 중에 네가 신앙 좋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위에 거 다 만족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너는 교회 다니는 여자들 중에 아무나 하고 결혼해도 하나님 뜻에 어긋남이 없겠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기는 한다. 즉, 신앙 좋은 여자와 남자가 결혼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리실 것 같지는 않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1년 안에 결혼한다. ^^ 내 생각에, 결혼할 여자인지 아닌지는 처음 만났을 때 몇 일 안에 나타나는 수가 있고, 아니면 쭉 오래 알고 지냈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결혼할 사람이라고 불현듯 느낌이 오면, 결혼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오래 만나나 짧게 만나나 별 상관이 없더라고. 나 우리 집사람 처음 만나고 몇 주안에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었잖아. 근데 니가 다니는 교회에 신앙 좋은 여자 중에 니가 마음에 드는 여자 없으면, 친구한테 놀러가서 그 교회 방문해보면 좋다. 우리집에도 온나. 우리 교회 데리고 가 줄게. 시집 보내야 하는 부모님들 꽤 있다. 아 그리고 그래도 안되면, 안 믿는 여자 만나서 전도하면 된다. 이건 좀 리스키한데, 나는 되더라. 우리 집사람 요새 내보다 신앙이 갑절은 좋은 것 같다. 아 봄방학 대 보스턴 갈려다가 말았는데 갔으면 연락할려고 그랬거든. 그래서 들렀는데, 이상한 글이 있어서 답글 달고 간다. 잘 지내고.

    • 2010/03/18 02:45

      보스턴 오지 그랬어..
      요즘 보스턴 날씨 너무 좋아서 보스턴 아닌거 같은데 말이지..
      남녀가 만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 모두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자연스러움이 있는 것 같다..
      결혼할 사람일지 아닐지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달려 있을 듯..^^ ㅎㅎ Thanks for your advice..

  2. 2010/03/24 19:45

    목군 ㅎ 오랫만이지? 어여 좋은자매 만나서 알콩달콩 둘이 사는 모습 보여주시게나 기대하고 있을께~! ^^

    • 2010/03/25 02:00

      ㅎㅎ 누나 오랜만.. ㅎㅎ 누나 아직 LA에 있나?
      한국에 갔다는 얘기도 들었었는데..
      얼굴 본지도 진짜 오래된듯 싶네.. 쩝..
      한국이든 LA든 보스턴이든.. 함 봅시다..~~
      누나의 기대에 곧 부응할 터이니.. ㅋㅋㅋ

  3. 2010/04/23 19:53

    오...... 이 글 지금 쭉 훑어봤는데, 나중에 더 자세히 읽어바야겠어요. ㅎㅎㅎㅎㅎ

  4. 2010/04/25 08:34

    비밀댓글입니다

    • 2010/04/25 12:02

      ㅎㅎ 오랜만.. 어찌 지내나? ㅎㅎ
      정독 잘 하고.. ㅋㅋ
      글을 읽는다고 찾게 되는건 아니더라.. ㅋㅋㅋㅋ
      이번에 한국은 못갈듯.. ㅠ.ㅠ 으흑으흑..

  5. 2011/05/19 02:43

    필요했던 글이어서, 검색하다가 들르게 되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


또 한번의 수련회를 다녀오다..
보스턴에 오고 나서 좀 그런 경향이 있지만.. 수련회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없어졌다.
(이건 왜 이럴까? 고민해 볼 문제이다..)

이번에도 가야하니까 가는 뭐 그런 마음으로 수련회에 등록했다. 그리고 다녀왔다..

수련회에서 무엇을 얻고 돌아왔는가..를 묻는다면.. 별로 없는 것 같다..
작년과 같이 기도가 너무나 잘 되었던 수련회가 아니어서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 저녁때 어쩜 이렇게 기도가 안되는지..
벽보고 기도하는 것 보다 더 답답했다..
그래서 빨리 기도회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데 왜 이리 안 끝내시는지.. ㅎㅎ

물론 채워야 할 기도의 내용은 결국 주일 오전 예배때 채우게 하셨다.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간다고나 할까..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신앙의 모습은.. '십자가'를 대할 때 그 구원의, 은혜의 감격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안신기 전도사님을 뵈면서 너무나 부럽고 멋져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 사명자로의 삶, 영혼을 향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실때..
주체하기 힘든 그 마음의 감격과 사랑이 넘치는 모습이다..

요즘 그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 알려주시는 중인 것 같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다가 터져 나오는 눈물이 감사했다.
내 영혼이 메마르지 않고,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1년만에 온 같은 장소로의 수련회인데.. 참 많은 것이 변했다..
그 당시에는 30명도 다 모르는 가운데 정말 조용히 있다가 갔는데..
지금은 30명만 모르고 나머지는 거의 다 알 정도로 공동체가 편해졌다..

김연아 경기를 보러 갔다는 이유로.. 이미지가 참.. 작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미지로 바뀌었고..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가.. 매우 조급해 하고 있는 이미지도 얻고 있고 ㅡ.ㅡ;
타이밍 하고는.. 참..


한가지 확실해진 것..
강사로 오신 양한갑 선교사님 간증을 들으며, 그리고 안신기 전도사님 가정을 보며..
다시 한번 배우자 기도에 대한 우선순위를 잡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강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나를 붙잡는 사람..
모든 사역에 있어서 나를 지탱시켜주는 사람..
가슴 뛰게 하는 내 반쪽의 모습이다.. 그래야 우리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 많은 사람중에 호감가는 사람이 없다면 독신의 은사가 있거나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완전 무서우신 사모님의 한마디가 왜 이리 무시무시하던지.. ㅋㅋ
이번 수련회는 나한테 무슨 결혼준비 수련회였던 것 같다..
기도는 안되는데 내내 들은 얘기가 그거 밖에 없어서 ㅡ.ㅡ+ (이 역시 인도하심이라 믿으며~ ㅎㅎ)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을 뛰게 한 한마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일을 맡기실 때에는.. 거룩한 삶을 가진 자를 부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삶이 내 삶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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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론'..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세미나 첫번째 강의 제목이다..
즉, '제자훈련에 미쳐야 한다'는 말씀..

물론 교회를 목회하는 교역자들에게 하는 메세지이고,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CAL 세미나때 하시는 것이지만,
대학부때 감사한 기회로 평신도로서 제자반을 인도할 수 있게 되서 그 강의를 들었다.

제자훈련에 미치다.

마치 방법론 같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테크닉 같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꺼다라는 공식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제자훈련은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다.

성육신의 마음으로 낮아져서 모든 영혼들에게 문을 여는 회중예배.
지체로 부름 받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양육과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간증과 기도가 있는 소그룹.
평신도 지도자를 키워내며 어디서나 제자를 삼는자로 세우는 제자훈련.
그리고 리더들을 훈련시키는 리더모임..

이것이 교회의 뼈대인 것 같다.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흘러가는 아름다운 지체..


신앙의 홀로서기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꼭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신앙의 홀로서기와 영혼을 양육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제자훈련이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셨다.


나는 제자훈련에 미쳤다.
제자 삼는 일, 훈련 하는 일, 말씀 연구하는 일, 기도하는 일..
이게 없던 지난 시간은 정말 답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 가능성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나의' 제자가 아닌 '예수의' 제자를 삼는 일이기에..
받은 사랑을 전하면 되는 것이기에..
감사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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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Outreach로 정순누나가 일하시는 요양원에 다녀왔다.
그냥 일반 노인 분들부터 해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 치매 걸리신 분들까지 계시는..
어찌보면 '외롭고 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원래 Outreach를 시작하게 되었을 처음에는..
순장으로서 뭔가 outreach에 관한 idea를 내야 했는데 정순누나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줘서 고마웠고 좋았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를 준비해야 하고,
그리고 시험과 기타 여러가지 일들로 분주한 가운데 사람들을 챙기고 메일을 보내고 하는 것이 조금은 버거웠던 게 사실이다.
특히, 함께 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총 몇명, 누구인지도 불확실했고,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가 불분명했기에
뭔가 붕~ 떠있기만 하고 부담감은 계속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중간에 '이런거 한다고 그분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가서 몇곡 부르고 오는게 좋나..'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일은 이런 염려를 뛰어넘는 풍성한 결과가 있다.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보면대를 안가져왔다는 큰 실수..
모두들 갑자기 creative 해져서 정순누나 사무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보면대를 만들었다.
두꺼운 종이와 노트패드를 키보드에 끼우질 않나..
물건 나르는 카트 위에 뭔가를 올려서 바이올린 연주자용 보면대를 만들지 않나.. ㅋㅋ

뭔가 부족하니까 그 위에 넘치는 은혜가 임하는 것일까..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에서부터 어르신 분들의 마음이 열리길 시작했다.
치매에 걸리신 분들이 모여 계신 곳 부터 갔었는데..
정순누나 말로는 원래 1분 이상 계속 앉아 계시지를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분들이 우리 공연 끝까지 앉아계셨다.

몇 곡의 클래식 곡과,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연주했는데..
뒤에서 듣는 내 마음이 어찌나 감동되던지..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들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공기의 떨림의 작은 움직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멍하게 앉아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그분들의 마음을 만지셨고..
몇몇 분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함께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들며 기뻐하게 하셨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합창으로 부른 Jingle Bell과 Because He Lives(살아계신주..)..
Jingle Bell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그분들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했던 재롱잔치였다면..
살아계신 주는 정말 우리가 알려주고 싶었던 메세지를 담은 곡이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노래를 마친 후에.. 우리를 보시며 너무 고맙다고 하시는 그분들의 눈빛..
사랑스럽다.. 너무 이쁘다.. 고맙다..
떠나 보내기 싫어 끝까지 따라 오시는 모습..

우리가 무엇을 전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넣어 주신걸까..


두번째 공연을 했던 곳도 같은 은혜의 충만함이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가 연주될때 그 가사를 따라 부르시던 한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연주가 끝날때 마다 책상을 크게 치며 좋아하던 뇌성마비 걸리신 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 자리에는 과거 엄청난 부자들도 있었고, MIT 교수이었다가 치매에 걸려 오신분도 있었다..
자녀들에게 버림 받고 오신 분들.. 자녀와 함께 오신 분들..
그들에게 우리가 외친..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이 메세지가 전달 되었을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공연을 마치고 한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의 휠체어를 끌어서 병실까지 모시고 갔는데..
연신 말씀하시는..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그런 말을 받을 자격이 있는 내가 아닌데..


함께했던 14명..
연주하며, 노래하며, 춤추며, 뒤에서 지켜보며..
모두들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의 섬김이 어찌나 귀한지 모르겠다..
조금은 삐딱하게 준비했던 나와는 다르게 너무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헌신했던 모두들..

기도와 묵상 가운데 너무나도 멋진 찬양 선곡을 해준 현정누나..
바쁜 와중에서 밤을 새가며 악보를 찍어 준 지용누나..
그냥 부탁만 하고 한번 챙겨보지도 않았는데 좋은 선곡과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 진희누나, 미연누나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황스러웠겠지만 기쁘으로 함께해준 정환이.. (not me)
얼떨결에 피아노 옆에 서 있다가 나한테 낚인(?) 현이..
밴 운전에 사람들 다 라이드 해준 은지누나..
늦게 집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사람들 점심준다고 '비빔밥'을 만들어 준비해준 정순누나..
함께 하기로한 윤정이가 한국 가서 순장이 없는 가운데서도 사람들 잘 커버해준 에스터
귀엽게 몸을 튕겨주며 꼭지점에서 움직여준 동은이..
정말이지 함께 참여해주고 곁에 있어줘서 너무나 고맙고 힘이 됐던 희찬형..
기도로 찬양하는 멋진 재윤형..
그리고.. 막내라는 사실을 오늘 알았지만^^ 항상 방긋방긋 웃으면서 함께해 준 지현이까지..

참 하나님은 독특하게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오늘 먹은 비빔밥처럼~~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음을 안다..
Just because He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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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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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2 21:23

    비밀댓글입니다

    • 2010/01/02 22:28

      사람은 두가지 모습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는건데..
      다르다고 생각하지?
      표현을 안 하고 있을 뿐이지 마음엔 다 똑같은데 말이지..
      훗..

  2. 2010/02/02 22:29

    비밀댓글입니다

Christmas..

며칠 전 순장모임때 각자의 크리스마스를 추억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
근데 별로 기억나는게 없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많은 것을 했었다.
음.. 나에게 인상 깊은 Christmas는 무엇이었을까..

어렸을 때 서울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분명히 성탄 축하 예배 이럴때 나가서 발표하고 했을텐데.. 기억이 가물가물..
어렴풋이 새벽송을 어른들과 함께 돌았던 기억이 난다.
매우 추웠던 밤에 촛불을 들고 둔촌동 일대를 돌면서 초콜릿, 사탕 등을 수거(?)했던 기억들..


아.. 물론 사진으로 남아있는 눈물에 젖은 크리스마스가 있기는 하다.
유치원때인데 내가 손을 하도 빨아대서 집에 찾아오신 산타 할아버지(유치원 알바 선생님)께서
매우 무섭게 앞으로 손 빨지 말라고 혼내서 펑펑 울며 선물을 받았던 사진이 남아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 참 웃기다..
산타할아버지 무릎 위해서 완전 덜덜 떨고 눈 퉁퉁 불어있는 내 모습과,
그 뒤에서 승리의 웃음(?)을 짓고 계신 우리 엄마.. ㅋㅋ
그 뒤로 정말 손을 안 빨게 되었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


그리고 조금 또렷이 기억 나는 것이 중국에서 맞은 첫 크리스마스다.
중국에 도착했던 날이 12월 24일이었으니까..
그날 바로 북경으로 갔었고, 그때 21세기 교회에서 드렸던 크리스마스 예배..
중국이라는 땅이 너무나도 낯설고 싫기만 했던 그때..
아이들의 재롱잔치와 북적이던 교회가 아직도 기억나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두번째 중국에서 맞았던 크리스마스는 용봉호텔(롱펑판덴)에서의 예배였다.
정확히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는지는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주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브날이었을지도..
그때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했었다.
생전 처음 '할렐루야'를 불러봤던 장엄한 순간.. ㅎㅎ
몇명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잘 하지도 못했었겠지만, 그때의 즐거움이 아직 생각나는거 보면 좋은 경험이었나보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기억날 만도 한데 인상깊지는 않다.
'올나이트'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로 시작되는 밤새며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친했던 친구와 함께 '찬미예수 1500'을 1번부터 1500번까지 기타치며 찬양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순수했던 신앙과 열정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긴 하다..

당시에는 '예람의 기도'라는 매년 끝에 중고등부가 함께 하는 찬양집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준비가 거의 연말의 핵심이었다. 보통 성탄절 전에 끝냈기 때문에 그 집회가 끝나고 나서는 아마 뻗지 않았었을까..
고3 끝난 크리스마스 때는 남성 중창단 '새벽이슬' 콘서트를 했던 것도 같다. ㅋㅋ
노래도 잘 못하는 것들끼리 모여서 이런 저런 찬양 부르며 했던 것.. 생각해보면 참 귀엽다..


대학에 와서 서울에서 교회를 다녔지만 성탄절때는 꼬박꼬박 집에 내려갔던 것 같다.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떄문이고 잘 했던 것 같다.
왜냐면 막상 20대때 부모님과 성탄절을 보낸 것이 딱 2번에 불과하다.
대학교 1,2학년때 빼고는 다 함께 못 보냈던 것 같다..

군대에서 보냈던 두 번의 성탄절은 뭐 별거 없었다. ㅎㅎ
성탄절 전에 C3 작참부 Christmas Party가 있어서 놀았던 적도 있고,
성탄절 당일날은 국군중앙교회에 가서 조금 더 나은 음식 먹었던 것 같다.
아! 두번째 성탄절때 서울 시내에 있는 부대 새벽송을 돌았던 기억이 난다.

국방부 부대들을 돌면서 통역병 동기들 만나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었고
마지막으로 현충원에 가서 캐롤을 불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그러고는 나의 국제적인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
2004년 크리스마스는 북경에서였다.
크리스마스 한 주전에 한국에 갔다가 1주일만에 왔는데 돌아오는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다들 왜 한국에서 안 보냈냐고 했지만, 한국에서 보낸다고 뭐 달라지나..
하지만, 아마 크리스마스 이브가 우리 부모님께서 중국에 가시는 계기가 된 날이었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성탄절날은 조금 원 없이 논 성탄절이었다.
아침에 성탄예배 드리고.. 화칭에 있는 발맛사지 집에서 실컷 발 맛사지 받다가..
저녁에 Broadway 팀이 공연했던 Musical Chicago를 암표를 사서 VIP석에서 봤던.. ㅋㅋ
뭐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탄절을 보낸 듯.. ㅎㅎ


2005년 크리스마스는 New York에서 였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Manhattan에서 우산도 없이 영덕이와 함께 하염없이 길을 걸었던..
아마 내 인생의 worst Christmas로 기억되는 것 같다. worse than in 군대..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가운데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Peppermint Mocha로 몸을 녹이는 것 만으로도 매우 감사했던.. ㅎㅎ


한국으로 돌아와서 간사로 섬기던 첫번째 크리스마스는 성탄축제와 함께였다.
성탄절은 우리만 즐거워 해야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장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성탄절때 전도집회를 했었다. 그리고 참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사랑의교회 사랑부에서 장애우들이 만든 성탄 쿠키를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에게 나눠주는 아이디어..
정말 사랑이 사랑을 타고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된다..

성탄절 당일날은 예배를 드리고 평소에 가고 싶었던 Papertainer Museum을 갔던 것 같다.
그냥 기분 전환 한듯~~


한국에서의 마지막 성탄절이었던 2007년..
똑같이 성탄축제를 했었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성탄 T-Shirt를 만들어서 판매했던..
그리고 간사들과 함께 오손도손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사랑하는 간사들..
하지만 성탄절 당일날 뭘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라는.. @.@


보스턴에서의 첫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에 City Life Church에서 Carol Worship을 드렸고.
성탄절날 늦게 일어나서 어이없이 성탄 예배에 지각했었다는.. (라이드 해준 종찬이에게 더욱 미안.. ㅡ.ㅡ;)
그러고는 Shabu-zen에서 샤브샤브를 먹고 훈이형네서 놀다가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조금은 허무했던....


이렇게 적어보니 나름 다채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것 같다.
남들처럼 여자친구랑 크리스마스를 romantic하게 보낸적은 없지만,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보냈었기에 그래도 의미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억에 여기저기 구멍이 있고, 지금 적은 기억마저도 사진들을 꺼내며 확인했다는 것은..
그다지 기억하고 싶은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나 크신 분이 작디 작은 인간의 모습으로 힘겹게 내려오신 은혜의 날인데..
나는 그 은혜의 날을 28번이나 그냥 흘려보낸건 아닌지..


이번 29번째 Christmas..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예수님과 조금 깊이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Happy Birthday, Jesus!!
This day gives me the reason to live.
Thanks, Lord.. Thanks..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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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7 07:19

    이 글 읽으면서, 나는 작년에 뭐했더라....생각하려 애쓰고있었는데...
    글 안에 정답이있었네 샤브젠-훈오빠집
    그렇다고, 너 허무하다고 할수있어??!!!!!!! ㅋㅋㅋ

    • 2009/12/27 08:47

      ㅎㅎ 훈이형과 누나랑 있어서 허무했던게 아니라요.. ㅋㅋ
      그때 기억 못하시나?
      다들 저녁에 청년부 모임 간다고 갔는데..
      저만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갔던.. ㅠ.ㅠ
      그래서 허무했던거죠.. 불쌍하게. ㅠ.ㅠ

    • 2009/12/31 12:04

      나도 안간걸로 기억나는데...넘 휘곤해서 ㅎ
      좀 같이 가지그랬어~~ㅎ

    • 2010/01/01 18:34

      올해도 안 갔다는.. ㅋㅋ
      안 갔다가 욕을 엄청~~ ㅋㅋㅋㅋ

  2. 2010/01/24 23:41

    너가 약속장소에 늦어주신 덕분에 even worse 해졌지. ㅋ

  3. 2010/03/07 23:59

    너랑 같이 보낸 크리스마스가 2번이나 있었다고 나는 기억하건만!! 실망이야 목정환!

    • 2010/03/08 01:05

      음.. 그러고보니 2007년에는 너랑 보낸거 같군..
      나머지 한번은 언제일까나?
      2002년에 부대로 놀러 왔던건.. 크리스마스 당일은 아니었던거 같은데.. ㅎㅎ
      근데 너 왜 내가 전화하면 전화 안받아 ㅡ.ㅡ+

사랑의 교회가 성전 건축을 한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때 대충 들어서 알았는데, 최근 몇 주동안 건축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신기한 것은 내가 이미 그 땅에 가봤다는 것이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때 예술의 전당을 잠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 무턱대고 걸었는데..
쭈욱 걸어 내려온 곳이 서초역이었다.

그때 비가 좀 많이 내리고 시간이 남아서 서초역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건너편이 공사중인 것 처럼 흰색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것을 보면서 "야~ 강남에 아직 건물이 안 세워진 땅이 있다니 대단하다. 이땅 진짜 좋겠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사랑의교회 새성전 건축부지란다..
신기할 따름..

항상 교회가 건축을 하게 될때면 말이 많다.
왜 건물을 지어야 하느냐, 교회가 건물 좋아서 무슨 소용이냐, 차라리 구제나 선교사업에 쓰면 낫지 않냐 등등..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은 아니다.

몇몇 몰지각한 교회들의 건축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잘못된 태도로 인해..
필요한 건축과 불필요한 건축을 분별해서 보는 눈이 우리에게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때는 교회 건축이 곱게 보일리는 없다. (당연하다)
건축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솔직함과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8년여 다니면서 공간의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다.
수백명일때 만든 교회 건물을 수만명이 사용하려니 공간의 협소함은 당연한 문제였을 것이다.
공간이 없으니 옆 건물을 이렇게 임대하고, 저렇게 임대하고,
리모델링하고, 다른 상업 건물들과 함께 사용하고..

그 나름대로의 추억도 있고 즐거움도 있었으나,
매번 모임을 하려면 장소 예약을 행정간사를 통해서 인터넷으로 요청해야 하는 신기한 교회였다.
(세상에 이런 교회가 어딨나..ㅡ.ㅡ+)
예배가 항상 앞뒤로 시간에 쫓겨서 '자유'로운 예배라기 보다는 시간에 맞추어서 예배를 짜야했다.
소그룹 모일 곳이 없어서 매번 이방저방 메뚜기 뛰었었다.
대학부 경우 공동체 사이즈가 700명이 넘어가서 분할을 해야하지만 장소가 없어서 분할을 못했다.
주일 예배가 6번이나 있어야 했기에 녹화 설교를 듣기도 했다.
본당에 들어가려면 예배시간 40분전부터 길게 줄을 서야했다..

나에게는 충분히 이 모든 것이 추억이다. 어찌보면 참을 수 있는 부분이다.
교회니까 감당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기준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새로오는 사람, 그리고 특히 청소년들과 어린 아이들에게 과연 이런 교회의 복잡한, 빽빽한 모습이 추억일까..
오히려 그들에게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될지도 모른다.


1000억이 들어간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울때 해야한다.
솔직히 땅이 너무 좋다. 좀 심각할 정도로 ㅡ.ㅡ;
하필이면 많고 많은 시기중에 이 최악의 상황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보면 서초동에서 그만큼 돈이 안 들어가고 건물을 지을 수 있을까..
경제가 어렵다고 하나님꼐서 주신 기회를 버릴까..
5만명이 모이는 건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적은 것이 아닐까..
강남에 사는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라 생각한다.

돈잔치 하는 것이라고 비꼴수도 있을 것 같다.
교육, 훈련, 구제, 선교를 위한 투자이고 인프라 구축이라 생각하면 과연 돈잔치에 불과한 것일까..

그 돈을 다른 곳에 쓰지.. 할 수 있다.
근데 과연 저 만큼의 돈을 다른 곳에 쓴다고 했을때 모일까?
성전 건축은 신앙 생활 중 훈련의 하나라 생각한다.


성전 건축은 돈 액수가 많다고 잘못된 건축도 아니고, 검소하게 했다고 잘된 건축이 아니다.
복잡하고 정신 없는 건물이 꼭 거룩한 것만도 아니다.
성전 건축은 성도들의 헌신에 의해 그 성공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예전 다니던 새로남교회의 건축할 때를 기억한다.
건축 시기에 내가 새로남교회를 다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가 새로남교회를 떠날때의 상황은 어찌보면 지금 사랑의교회의 상황과 비슷했다.
교회가 정말 좁아 터져나갈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건축 부지를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고,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헌금도 건물도 아니다.
바로 건축이 진행되던 당시 건축부지 옆에 세워져 있던 기도실이었다.
수 많은 성도들이 매일 끊이지 않고 와서 그 자리에서 눈물로 땀으로 기도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교회 성전을 결정짓는다..

과부의 두렙돈을 칭찬하셨던 것 처럼.. 그 헌신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아무쪼록 사랑의교회가 좋은 땅에 멋진 건물을 갖게 되면..
겉으로 보이는 것 그 이상의 하나님의 성전이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더욱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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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3 00:47

    비밀댓글입니다

  2. 2009/11/28 22:56

    나 이거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돼 ㅡ ㅡ
    1000억이라 - -

    담에 만나서 얘기해보쟈 ㅎ

    • 2009/11/30 03:57

      음.. 정확히 하면 2100억정도 들어가긴 한다네요..
      땅값이 1200억정도라고 하고..
      건물 및 부대 시설이 그정도 들어가고요..
      비싸긴 하죠.. ㅡ.ㅡ;

      교회 홈페이지에서 옥한흠 목사님께서 건축에 대해서 말씀하신거 한번 들어보셔요..
      그거 들으시면 일단 어느 정도는 정리 되실듯..^^

  3. 2012/01/06 15:23

    비밀댓글입니다

하나님 나라..

  크리스찬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많이 듣고 익숙한 단어이지만, 막상 가깝게 느껴지기 보다는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이다. 항상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당장의 나의 일상과는 관련이 없고 뭔가 나중을 위한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를 할때나 신앙 고백을 할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나의 실제적 삶과 신앙이 다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개념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7년부터였다. 나의 일상 신앙 고백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많아졌으며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에, 또 한국 사회에, 북한에, 세계 열방에 이루어지기를 꿈꾸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통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며, 2008년 겨울 수련회때 엄기영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체계적으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해하도록 해주셨다. 그때부터 나의 모든 신앙 고백의 기초는 하나님 나라가 되었으며, 그 나라의 꿈을 꾸는 것이 내 비전이 되었다.

  이곳 보스턴에 와서 믿음의 훈련과 영적 홀로섬의 외로운 시간을 거치면서 내 안의 하나님 나라는 사라지는 것 처럼 보였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마치 겨자씨 같이 보이지 않았던 씨앗이 떨어져서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마 13:31-32) 이제 그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욱 묵상하고자 한다.

  많은 부분은 엄기영 목사님의 말씀과 현재 온누리교회에서 순모임 시간에 다루는 내용이 기초가 되겠지만, 나의 묵상과 함께 보스턴에서의 생활에서 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도 포함될 것 같다. 얼마나 오랫동안 묵상을 계속할지도 모르겠지만, 작년이 '광야에서의 묵상'이었다면 올해는 '하나님 나라로의 묵상'이 될 것 같다.

  묵상을 하며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고, 동시에 나의 생각이나 신학적인 담론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를 원한다. 또한 성령께서 올바르게 묵상할 수 있도록 조명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며..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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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1 00:01

    정환아 늘 말씀안에서 살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열심히 살고 있지?
    나는 요즘 영적으로 육적으로 매우 바쁘다.
    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쁘고
    또 손주를 두명이나 보아서 아가들 보기 바쁘구나.

    아들은 3월달에
    딸은 8월에 가가 아들을 낳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단다.
    ㅎㅎ


현실이라는 환상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이라는 실재에 뿌리내리고 살자..


또 한번 믿음의 시험을 지났다.
퀄시험 발표를 앞두고 3일간의 피말리는 새벽기도에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연단시키셨다.
두려움과 걱정을 간신히 내려 놓았을때.. 그때 웃으시며 "이제 됐다."하시는 하나님..

현실은 한없이 두렵기만 하고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두렵게 하던 현실은 환상이었다.
역시나 믿음이 진실이었다. 믿음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였다.

엄청난 불확실성의 긴 터널을 간신히 통과하고, 이제 조금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길에 나의 마음을 둔다면 또 다시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현실은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시험 결과가 나온 뒤에 알게 된 사실..
나를 위해 기도해준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어머니께서 양육하시는 중국 사람..
내가 시험보는 시간이 중국 시간으로 매우 늦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까..

결국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되는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노력으로 만들어져 가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금요기도회에서 크리스 해리슨 목사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주셨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실때 짧은 기도지만 처음에 하신 말씀이 너무 강해서 나머지가 기억이 안난다.
"May the fire of God burn his life on the altar as a sacrifice...."

그리고 주신 성경 말씀은 로마서 12:1 이었다..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Roman 12:1~2)


처음에 말씀을 받았을때는 그냥 기도하실때 sacrifice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이 말씀을 주셨나보다 했는데,
오는 길에 은지 누나를 통해서 목사님께서 위 성경구절로 오늘 새벽에 설교를 하셨다고 했다.

그때 강조하셨던 것이 한글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서 마치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쉬운데, 영어 번역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시험해서 확인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보스턴에 와서 하나님께 물었던 "하나님의 뜻을 확인시켜 주십시오"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심지어 "시험"할 수 있고 "확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원하신다.
무언가 추가적인 것을 보고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성령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읽은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 예수처럼 살게 하신다.
'접신'을 하는 것 마냥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부른다고 성령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믿음의 모험은 Happy Ending으로 결정된 모험이기에 짜릿함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겪는 기쁨이 아닐까..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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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1 02:59

    ㅎㅎ 난 시험보고 좌절모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을때라.. 기도해준다는걸 깜빡했구나..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리더의 자리에 서게 된다.
아니, 한번 리더는 평생 리더이기에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순장으로 처음 간 순장모임..
이번 학기 주제는 "Kingdom of God"이다.. 하나님 나라..

미국으로 바로 오기 전에 내 가슴을 뛰게 했던 단어.. 하나님 나라..
내 사명선언서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단어.. 하나님 나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기 보다는, 함께 꿈 꾸는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작은 소그룹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경험하고, 그 나라를 확장하는..

언제나 소그룹 시작 전에 사람들의 이름을 받았을 때..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이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많은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한다고 할까나?

우리 순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또한 성령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가 기대된다.

이 첫 마음 그대로 학기 끝날때 까지 계속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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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8 04:53

    비밀댓글입니다

요즘 예배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다.
예배가 살지 않기에 삶도 뭔가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좀 갑갑하다..
아직도 교회가 내 공동체라는 생각이 안든다.. 그래서 붕 뜨는거 같기도 하다..

'내 공동체'라는 생각은 언제쯤부터 드는 것일까?
막상 생각해보려니 잘 기억이 안난다.. @.@

새로남교회를 다닐때는 처음에 알게되었던 병우와 친해지고 난 뒤 언젠가 부터였던 것 같다..
임원도 아니었는데 임원들과 친해져서 교회 행사 준비를 하면서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물론 고등부에 가서는 찬양팀 예나리를 하면서 내 공동체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됐고..

사랑의교회에서는 세가지 방향(?)을 통해서였다.
GBS를 통해서 아름누나의 케어가 매우 고마웠고, 80또래 형들을 알면서 행정팀을 하게 된 것, 그리고 또래 모임..
이러면서 내 공동체라고 생각하게 된 듯 싶다.

북경 21세기 교회에서는 교회 자체가 내 공동체라는 생각 보다는 SR 사역팀이 내 공동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시간도 짧았었고..

메릴랜드에서는 다니엘속 소그룹 통해서 내 공동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소그룹이 KBS 학교 성경공부모임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조금 애매했다..


결국 친한 사람을 만나고, 사역을 하면서 내 공동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나보다..
그런데 이런게 옳은 것일까? 물론 옳다 그르다를 꼭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내가 무언가를 해서 사람들에게 내가 드러나야(?) 그 공동체 안에서 내 필요성을 느끼고 그때 내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기분이 든다.
즉, '내 공동체' = '내가 소유한' or '내가 control(?)할 수 있는' 공동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너무 나쁘게 해석하나?)


보스턴에 와서 바쁘다는 핑계이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를 시험(?)해보고자 일부러 지난 1년동안 아무 섬김의 자리에 있지 않았었다. 그냥 평범한 조원으로 공동체에 있으면서도 내 공동체라고 느끼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꽝이다. 내 공동체라고 느끼기는 커녕, 예배 시간에 깊은 자리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1년만에 갔던 대학1부 예배시간이 훨씬 더 좋고 감사했었다.


간사 시절에 항상 고민했던 것.. 처음 온 사람을 어떻게 적응시켜야 하는가..
어찌보면 지난 1년간 스스로에게 적용하며 실험해봤던 건데..
흠.. 일반화 시킬수는 없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뭔가 사역을 해야 내 공동체라고 느끼나보다.

그냥 소그룹 모임에서 조용히 있으면서도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고 하는 뭔가 이상적인(?) 그런 사람은 될 수 없을라나.. 섬김의 자리에서 사역을 하는 내 마음에는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지 않고 싶지만 그런게 사실인지라.. ㅠ.ㅠ


내 공동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일까..
나랑 워낙에 맞지 않는 공동체일까..
내가 사랑의교회 대학부 스타일에 너무 젖어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1년 내내 했다. 뭔가 갑갑한.. 아쉬운..

몇주뒤면 이제 첫 섬김의 자리에 서게 된다. 오랜만에 하는 리더의 자리..
이런 가운데 과연 리더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대학부와는 너무 다른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기대하는 것도 달라져야 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라야 하고,
함께 해야 하는 것도 달라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

그래서 기도를 해야하는데 문제가.. 예배가 회복되지 않아서 기도도 잘 안된다.. 휴..


공동체.. 공동체.. 공동체..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항상 고민이다..

아.. 나의 사랑 나의 고민.. 나의 교회..
Posted by Mo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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